본문 바로가기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12, 원균,권율에게 곤장을 맞다. 김세곤 글 무등일보 연재

호남정신 뿌리를찾아-12.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다
해군 총사령관 원균, 싸움 피하다가 치욕 당해
입력시간 : 2013. 02.06. 00:00



칠천량해전비, 칠전도로 들어가는 칠천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직접 출정하라는 조정 지시 수차례 무시

왜선 보고 물러나다 피해만 당하기 일쑤

안골포 및 가덕도 해전을 수행한 조선수군은 일단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안골포에 주둔한 왜적의 전투력이 그리 강하지 않으니 계속 공격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조정의 지시를 묵살한 채 출전을 기피하고 있었다.

7월초에 새로 건조한 일본전선 60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이 전선 가운데 일부가 웅천으로 들어가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왜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7월4일에 조선 수군은 다시 출전을 단행하였다. 이 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 머무르면서 직접 출전하지 않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주축이 되어 휘하 수사들이 연합하여 출전하였다.

이 출전에 경상우수군 외에 나머지 어느 수군이 출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 수군의 절반 정도인 100여척이 전투에 나선 듯하다. 전라좌수군이 출전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원균이 전라좌수사를 겸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수군은 7월4일 한산도에서 출발하여 7월5일에 칠천도에 정박하고 6일에 옥포에 들어갔다가 7월7일 밤에 부산시 사하구에 있는 다대포에 도착하였다. 이 때 다대포에는 적선 8척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왜군들이 모두 육지로 도주하여 빈 배만 남아 있었다.

8일에 조선 수군은 왜선 8척을 부수고 군량미 2백 여 섬을 빼앗는 전과를 올리었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매우 고무되어 이런 전과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이 전투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수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이순신은 이때의 전투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난중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7월14일자 '난중일기'에는 왜군에게 달라붙은 김해사람 김억의 보고가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는 ‘7월7일에 왜선 5백 여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9일에는 왜선 1천척이 합세하여 절영도 앞바다에서 우리 수군과 싸웠는데, 우리 전선 5척이 표류하다가 동래 땅 두모포에 도착하였고 또 7 척은 간 곳이 없다’고 적혀있다.

7월15일에 이순신은 중군장 이덕필로 부터 조선 수군 20척이 적에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순신은 일기에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통제하고 방어할 길이 없으니 지극히 한스럽다’고 적고 있다.

한편 일본의 수군은 7월9일의 절영도 바깥 바다에서의 전투에서 짐짓 싸우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조선 수군은 지쳤고 먼 바다에서 풍랑마저 세차서 배가 표류하고 만 것이다. 7월16일자 난중일기에는 표류한 일곱 척의 행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노비 세남의 증언이 그것이다.

칠천교, 칠천도는 연륙이 되어 있다.



저녁에 서생포로부터 맨 몸으로 도착한 세남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7월4일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이 되어 5일에 칠천량에 이르러 자고 6일 옥포로 들어갔습니다. 7일 새벽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렀더니 왜선 8척이 정박하고 있어서 여러 배들이 바로 돌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왜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뭍으로 올라가고 빈 배만 떠 있었습니다.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어 불 지르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였습니다. 때 마침 적선 1천여척이 대마도로부터 건너와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왜선이 흩어져 피하므로 끝내 잡아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탄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멈추지 못하고 서생포 앞 바다에까지 표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뭍으로 올랐는데 거의 다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저만은 혼자서 수풀 속에 들어가 엎드려 기어서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듣고 나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는 것은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난중일기 1597년 7월16일)

조선 전선이 표류한 것은 절영도 바깥 바다 멀리까지 항해하여 바다 길을 벗어난 까닭으로 보인다. 세남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서생포는 가장 악독한 왜장 가토가 주둔하고 있는 포구였다.

아무튼 조선 수군은 부산으로 들어오는 왜군을 막기 위하여 출전하였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절영도 외양해전은 7월22일의 어전회의에서 상호군 노직이 ‘7월9일의 전투에서는 군졸들이 겁을 먹고 화살 하나를 제대로 못 쏘았다고 합니다’라고 표현 했을 정도로 사실상 패전과 다름없는 무기력한 해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원균이 직접 나가서 싸우지 않은 것을 크게 질책한다. 7월10일의 선조실록을 읽어보면 선조는 원균에게 후퇴하지 말고 왜적을 공격하라고 엄중 경고한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군을 왜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제장들이 명령을 잘 이행하지 않아 부득이 출병하였다가 앞 다투어 돌아옴으로써 크게 형세를 이루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양총병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접견할 때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거론하여 미리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하유하되 시급히 전일 분부한 대로 수군 제장을 엄하게 독려하는 한편 기회를 살펴가며 도모하여 기회를 잃어 대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했다.

이에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원균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하였다.

선조는 원균에게 전에 없이 강경한 어조이었다. 선조가 이순신을 구속한 것은 이순신이 출전을 안 한 탓인데, 왜군을 공격하겠노라고 큰 소리 친 원균이 계속 머뭇거리고 있으니 엄청 화가 난 것이다. 그의 질책에는 ‘원균의 실패는 이순신을 끌어내린 선조 자신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속내도 작용하였으리라.

절영도 외양 해전이 실패로 끝나자 도원수 권율은 통제사 원균을 곤양의 도원수 진영으로 부른다. 권율은 선조의 명을 받들어 출전을 독려하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원균이 계속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권율은 극약 처방을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7월11일에 권율은 이번 출정을 휘하 수사들에게 맡기고 원균이 직접 출정하지 않은 점, 일본 함대를 보고도 그냥 물러난 점, 조선 수군이 피해를 입은 점에 대하여 질책하면서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엄하게 나무란다.

그리고 원균이 직접 전투에 나서라고 하면서 곤장을 친다. 조선의 해군 총사령관이 볼기를 까고 곤장을 맞은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원균은 장졸들이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고 이미 장마가 시작되어 출항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에 장마가 그치면 출항하겠다는 뜻을 개진하였지만 권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율과 원균은 이미 신뢰관계가 깨진 상태였다.

7월12일에 원균은 수군 전체를 이끌고 출전한다. 권율과 이원익은 수군을 나누어서 교대로 왜적을 견제하도록 하였지만, 원균은 권율에게 볼기를 맞은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수치심과 분노에 가득 차서 모든 함선을 출전시킨다.

12일에 칠천량에서 밤을 보낸 수군은 13일에 옥포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보내고 14일에 부산에 이르러 일본에서 오고 있는 천 여척의 배와 마주친다. 조선 수군이 부산에 도착한 7월14일에 이순신은 이상한 꿈을 꾼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체찰사가 함께 어떤 곳에 이르렀더니 시체가 많이 널려 있어서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기도 하는 꿈이었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