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는 토요일입니다'
특파원으로 오기전에 인도생활에 많은 조언을 해주던 삼성그룹 경영기획실에 근무하던 분에 얘기해준 얘깁니다. 그는 1년간 지역전문가로 인도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왜 토요일이냐구요.. 바로 잡지들이 나오는 날이라고 하더라구요.
인도는 잡지는 물론 신문 등 인쇄 매체들의 천국입니다. 인도 잡지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아웃룩이죠.. 가격은 20루피. 우리 돈으로 400원 남짓입니다. 하지만 저렴하다고 얕보면 안됩니다. 그 유명한 뉴욕타임즈의 칼럼리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우리에겐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세계는 평평하다고 더 유명하죠)도 늘 구독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는 몇년전 아웃룩에 나온 '지피족'이란 말로 칼럼을 써 유명해지기도 했죠. 지피족이란 인도 전통 의상 대신에 지퍼가 달린 청바지 등을 즐겨 입는 인도의 신세대를 가리킵니다. 어쨌은 이번 주엔 간디의 은밀한 사랑이란 표지제목으로 사람 눈길을 끌더군요.
![크기변환_일괄편집_간디_1934년대_모습[2].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490/1990/1/%C5%A9%B1%E2%BA%AF%C8%AF_%C0%CF%B0%FD%C6%ED%C1%FD_%B0%A3%B5%F0_1934%B3%E2%B4%EB_%B8%F0%BD%C0%5B2%5D.JPG)
<뭄바이의 그의 기념관에 있는 초상입니다>
간디의 손자가 쓴 책에서 간디가 타고르(한국은 동방의 등불이라고 말했다고 더 유명한 사람이죠)의 조카와 사랑을 했다는 거죠. 그것도 40여년 동안,, 물론 정신적인 사랑입니다. 일부에선 간디를 상업화하려는 수단으로 후손이 사생활을 활용했다는 비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도 더 인간다운 간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해명도 무시할 순 없겠죠...
기사의 소제목도 '간디 어르신의 인간적인 밀회'(Bapu's human tryst)였으니깐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인가요....아래에 조선일보에 게재된 기사 내용을 첨부합니다...
![크기변환_일괄편집_머니_버원의_간디의_소박한_거실[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490/1990/1/%C5%A9%B1%E2%BA%AF%C8%AF_%C0%CF%B0%FD%C6%ED%C1%FD_%B8%D3%B4%CF_%B9%F6%BF%F8%C0%C7_%B0%A3%B5%F0%C0%C7_%BC%D2%B9%DA%C7%D1_%B0%C5%BD%C7%5B1%5D.JPG)
<뭄바이에 머무를 당시(1917~1934)의 간디가 지내던 소박한 거실입니다. 당시 그대로 보존 중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다음은 조선일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인도의 국부(國父) 마하트마 간디(Gandhi)가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Tagore)의 조카딸 사라라데비(Saraladevi)와 4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신적인 사랑을 나눴던 것으로 밝혀졌다.
간디의 손자인 라지모한이 최근 펴낸 책 ‘한 남자와 그의 사람, 그리고 제국에 대한 진실’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았다고 인도 유력 주간지인 ‘아웃룩’이 26일 독점 공개했다.
책에 따르면, 간디는 1901년 32세 때 콜카타 의회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라라데비를 처음 만났다. 간디보다 4살 연하인 사라라데비는 사업가와 결혼했으며, 음악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인텔리 여성이었다. 이후 간디와 사라라데비는 1940년까지 편지 등을 주고 받으며 연민의 정을 이어가다 한때 ‘정신적인 결혼’ 단계까지 이르렀다. 간디는 문맹(文盲)인 자신의 아내 카스투르바이에 비해 폭넓은 교양을 갖춘 사라라데비에게 매료된 것으로 라지모한은 추정했다.
하지만 간디는 사라라데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는 아버지와 딸, 오빠와 누이와 같은 관계”라고 거듭 강조했고 사라라데비는 이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간디의 장남인 데바다스, 그리고 데바다스의 장인이자 간디의 친구인 라자고팔라차리, 그리고 간디의 비서인 데싸이 등 3명도 알고 있었다. 간디는 나중에 “나의 자서전에 이 부분(사랑 얘기)을 뺀 것은 너무 개인적인 얘기였기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는 일화도 이 책에는 담겨 있다. 간디는 13세(1882년)때 결혼해 세 아들을 뒀지만, 1906년부터 ‘육체와 정신을 모두 따르면서 살 수는 없다”며 브라마차리아(금욕) 생활을 시작했다. 라지모한은 “순결은 할아버지가 일생 동안 살아온 이유였지만 애정에 대한 그리움은 또 다른 문제였다”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이 책을 냈다”고 설명했다.
/뉴델리=이인열특파원 yiy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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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뭄바이에 머무를 당시(1917~1934) 의상의 변천사입니다. 재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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