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독일 프랑크푸르트(46) 슈테델 미술관- 앙리 마티스 (1)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독일 프랑크푸르트(46) 슈테델 미술관- 앙리 마티스 (1)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5.06.18 04:00

2024년 3월31일, 슈테델 미술관 현대화가 전시실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마르크 샤갈(1887~1985) 그림을 보았다. 마티스의 그림은 키르히너 그림 왼편에 전시되어 있고, 샤갈 그림은 두 점이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살펴보자. 그림 제목은 ‘꽃과 도자기 접시’이고 1911년 작품이다.

이 그림을 감상하기 전에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에 대하여 알아보자.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앙리 마티스는 1869년 12월 31일 프랑스 동북부의 르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1882년부터 1887년까지 생캉텡 중등학교에 다녔고, 22세 때 파리로 가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1889년에 생캉탱에서 변호사 조수로 일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1890년에 맹장염에 걸렸다. 1년간 요양 하는 동안 그는 대부분 누워서 지냈는데, 어머니가 시간이나 때우라고 사 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1891년에 마티스는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였다. 1892년에 그는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학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사(模寫) 등을 하였는데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1826∽1898)의 눈에 띄어 1893년부터 모로의 화실에 드나들었고, 1895년에 드디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였다.
마티스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관심을 가졌고 1898년에 런던으로 신혼 여행을 가서 터너의 그림을 보았다. 1899년에 그는 고흐의 드로잉과 고갱 · 세잔의 그림을 구입하였고, 특히 세잔에 열광하였다.
이후 마티스 부부는 코르시카, 틀루즈로 전전하면서 세 명의 아이 부모가 되었고, 1900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몇 년동안 마티스의 생활은 상당히 궁핍하였다.
이 시기에 마티스는 앙드레 드랭을 알게되었고, 드랭으로부터 불라맹크를 소개받았다. 1905년 여름에 마티스는 지중해변 어촌 마을 콜리우르 에서 드랭, 블라맹크와 함께 보냈다. 콜리우르 체류는 마티스의 창작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1905년 가을에 마티스는 드랭, 블라맹크, 마르케와 함께 파리의 가을 살롱전에서 합동 전시회를 열었는데 곧 사람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거침없는 색채 구사를 두고 그들에게 "야수 (野獸)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야수파의 탄생이었다.
평론의 주 과녁은 마티스가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이었다. 이 그림은 전시회 출품 직전에 간신히 완성된 작품으로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 중에 가장 컸다. 사치스런 의상과 화려한 모자를 쓴 우아한 귀부인 자세를 취한 마티스 부인(아멜리 파레르)은 감상자 쪽으로 몸을 사분의 삼 정도로 돌리고 있는데 얼굴은 파란색과 불그스런 색이다. 모자도 진하게 여러 색으로 칠하여 형태를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다. 마음의 표현을 그린 색깔들이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이 그림은 미국 출신 미술수집가 마이클 스타인에게 팔렸는데 덕분에 마티스는 파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의 그림값은 치솟았다. 게다가 마이클 스타인의 남동생 레오 스타인(1872- 1947), 여동생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 : 미국의 여류소설가, 시인, 극작가, 미술 수집가), 레오 스타인의 처제 사라 스타인 등도 마티스의 그림을 여러 장 샀고,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티스의 그림을 사라고 권유했다. (폴크마 에서스 지음 · 김병화 옮김, 앙리 마티스, 2006, p 14)
1906년에 마티스는 앵데팡당전에 ‘삶의 기쁨’을 출품하였는데 이 그림또한 격렬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문학적인 제목의 이 그림은 목가적이며 남녀는 춤추고 사랑을 하고 있으며 자연과 교감하고 있다. 말하자면 무릉도원, 파라다이스이다.

그런데 마티스를 후원하였던 시냐크마저 “철물점이나 잡화상에 걸려있는 천박한 간판을 연상시킨다”고 혹평하였다.
반면에 미술비평가 레오 스타인은 이 그림이 가장 중요한 현대미술이라고 생각하여 구입하였다. 아방가르드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레오 스타인의 집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마티스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1907년에 마티스의 그림은 다른 곳에 옮겨지고 그 대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 작품,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더구나 레오 스타인은 마티스 그림을 미국인 의사 앨버트 반스에게 팔았는데, 반스는 그 그림을 그의 산장에 걸어두어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한편 칸딘스키는 추상화 이론을 전개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요소에 관하여』(1912년)라는 저서에서 마티스와 피카소를 이렇게 대비하였다.
“마티스는 색채, 파키소는 형태. 하나의 거대한 목표를 향한 두 가지 접근법”
(폴크마 에서스 지음 · 김병화 옮김, 앙리 마티스, p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