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58회 노량해전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2025. 6. 11. 03:19

이순신 “적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58회 노량해전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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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5.06.10 14:09

 

왜군, 고니스 구원 광양만행

이순신, 모든 장수 대기 명령

가장 격렬한 동아시아 해전

이순신, 조총 탄환 맞고 절명

1598년 11월 19일, 노량은 죽음의 바다였다. 불패의 명장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에서 왜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11월 17일 초저녁에 순천왜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는 봉화를 올려서 남해도에 주둔중인 사위 소 요시토시(宗義智 대마도주 1568~1615)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사천에서 남해 창선도에 도착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와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산의 데라자와 마사노리 등은 고니시가 조명수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는 것을 알고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광양만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를 눈치챈 이순신은 모든 장수들에게 군비를 엄하게 하고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1월 18일 오후 6시경에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에게 협공을 당하느니 남해에서 오는 왜군부터 격퇴하고 나서 고니시의 귀로를 차단하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철군하는 왜군을 그냥 돌려보내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수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고 결연히 말하면서, 단독  으로라도 출전하겠다고 하자 진린은 별수 없이 이순신의 뜻을 따랐다.

11월 18일 밤 10시경, 조명연합수군은 480여 척(조선 수군 80여척,   명나라 수군 400척)의 배에 군사 1만7000명(조선 수군 7328명, 명나라수군 1만 명)을 싣고 왜교성 앞바다를 떠나 노량(露梁)으로 노를 저었다. 선봉은 이순신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이었고, 진린은 부총병 진잠,   유격장 계금 등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남해 창선도에서 노량으로 오고 있는 일본 수군은 함선 500여 척에 수군 1만5500명이었다. 사천의 시마스 요시히로가 300척에 8000명, 남해의 소 요시토시가 1000명,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5000명, 부산에서 온 데라자와 마사노리가 1000명, 다카하시 무네마스가 500명이었다. 

그런데 일본함선에는 정유재란 이후 주력선으로 자리잡은 대형 함선 아타게부네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사천성에서 명나라 제독 동일원을 물리치고 남해 창선도로 옮긴 시마즈는  노약한 군사들과 포로로 잡은 조선 사람들을 부산포로 보낸 다음  정예병만을 데리고 선봉에 나섰다.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전라우수사 안위,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 1554~1611), 충청수사 오응태, 해남현감 유형, 가리포 첨사 이영남, 순천부사 우치적,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안골포 만호 우수, 사도 첨사 이섬, 발포만호 소계남, 군관 송희립 등이었고, 명나라 수군은 부총병 등자룡, 부총병 진잠, 유격장 허국위·계금·심무· 양천운·마문환·장량상 등이었다.  

노량으로 가면서 이순신은 군사들에게 나무 재갈을 물렸다. 깊은 밤에  조용하게 은밀하게 항진하기 위함이었다. 약 2시간에 걸친 이동 끝에  조명연합수군은 18일 밤 자정 무렵에 노량 수로(水路) 좌단 쪽에 도착하였다. 이때 진린이 이끈 명 수군은 좌협이 되어 대도섬 북방의 죽도   부근에  포진하고,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우협이 되어 노량수로 좌단으로부터 관음포 입구에 횡렬로 진을 쳤다. 조명 수군은 닻을 내리지 않고 일본 구원 함대가 건너올 노량해협을 주시했다. 

자정 무렵에 이순신은 대장선 갑판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웠다. 그리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적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此讐若除   死則無憾)” 

이윽고 척후선으로부터 왜군 함선 수백 척이 사천 남쪽에 있는 광주양(光州洋 노량 수로 동단의 외양)을 통과하여 서쪽 노량방면으로 향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복병장으로 나가 있던 경상우수사 이순신도 왜군의 진입을 확인하고 급보를 보냈다. 왜선 500척 중 시마즈의 선발대 300여척이 먼저 노량(현재 남해대교 근처)으로 진입한 것이다. 

노량 해전은 왜군의 조총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선봉에 있던 조명수군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명나라 도독 진린은 도독기를 높이 올린 다음 북을 크게 올리면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순신도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왜적의 선열 중간 부분을 돌격해 들어갔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이었다. 해전이 시작되자 조선 수군은 천자 ·지자 화포 등 각종 화포를 쏘았다. 명나라 수군도 호준포·위원포(威遠包)·벽력포(霹靂砲 벼락·천둥소리 나는 포)를 일시에 쏘았다.

한밤중에 치러진 노량해전은 과거 다른 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000여 척에 달하는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일본의 함대가  서로 엉켜 싸운 가장 격렬한 동아시아 해전이었다. 

그런데 바람은 조명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불었다. 전투가 한창일 때 북서풍이 강하게 불자, 바람을 등진 채 싸운 조명연합수군은 화공전(火攻戰)을 구사하였다. 화전(火箭 불화살)을 쏘고 불붙은 섶을 던져 왜선을 불질렀다. 조명 연합 함대의 화공 전법에 무수한 왜선이 불탔다. 경상 우수사 이순신은 왜선 10여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전투가 계속되면서 조선 수군 장수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 싸웠다. 가리포 첨사겸 조방장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순천부사 우치적, 안골포 만호 우수, 사도첨사 이섬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가리포첨사 겸 조방장 이영남(1563~1598)은 자기가 탄 배를 몰아 왜선을 충격하고 불화살을 수없이 쏘아 왜선을 무력화시킨 뒤 군사를 거느리고 왜선에 뛰어올라 여러 명의 적을 죽이다가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부하들이 그를 구해냈지만 이영남은 전사하고 말았다. 나이 35세였다.   

낙안군수 방덕룡은 삼지창을 옆에 끼고 왜선에 뛰어올라 닥치는 대로 왜군을 죽이니 부하들도 뒤따랐다. 그도 왜적을 물리치다가 전사했다.  

흥양현감 고득장은 군관 이언량과 앞다투어 왜선에 뛰어들어 왜적을 참하다가 역시 전사하였다.  

순천부사 우치적은 적장 한 사람이 대궁을 휘어 잡고 지휘하는 것을   보고 쏘아 죽였다. 

안골포 만호 우수는 사도 첨사 이섬과 서로 신호하면서 대포와 불화살을 쏘았으며 대장선 이순신의 배를 찾아 호위하였다.   

명나라 수군의 활약도 돋보였다. 70세의 노장인 부총병 등자룡은 조선의 판옥선 1척을 빌려 타고 선두에서 수많은 적을 죽였다. 그러다가 혼전 중에 뒤에서 쏜 명군의 포탄이 잘못 맞아 등자룡이 탄 배가 불타기 시작했다. 등자룡의 군사들은 한곳에 모여 불을 피하면서 싸웠는데, 왜군이 배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인 끝에 등자룡은 중상을 입고 부하들도 다수 다쳤다. 이윽고 등자룡은 전사했다. (참고로 등자룡은 등소평의 조상이다.) 

유격 계금은 왜교성 전투에서 부상 당한 왼쪽 팔을 동여맨 채 오른 손에 미첨도를 들고 왜적 7명을 참살하였다. 부총병 진잠은 진린의 배를 호위하면서 진격하여 호준포와 위원포를 쏘았는데 왜선에 명중하는 소리가 먼바다에 까지 들릴 정도였다. 

한편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상대방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원하기도 하였다. 전투가 한창일 때 왜적이 이순신의 배를 에워싸자 진린이 포위망을 뚫고 대포와 화살로 적선을 무찔렀다. 다른 한편, 왜적이 진린의 배를 세 겹으로 포위하여 배에 뛰어오르려 하자, 이순신과 안골포 만호 우수, 사도첨사 이섬이 왜선에 불이 옮아붙게 하여 진린의 배를 구하였다.  

이렇게 대혼전이기는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승기는 조명연합수군으로 넘어갔다. 일본 수군은 조선함대의 화력을 견디기 어려웠다. 

조명연합수군이 화포를 쏘고 화공전을 맹렬하게 펼치자 왜군은  마침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관음포 포구가 바다로 나가는 출구로 오인하고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한참 노를 젓다가 왜군은 퇴로가 막힌 것을 알았다. 바다가 아니라 육지였다.    

날이 밝자 왜군은 이를 깨달았다. 관음포가 육지에 막힌 포구라는 사실을 안 일본 수군은 일부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했다. 나머지는 조명 연합수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생결단을 하였다. 이러자 전투는 더욱 격렬하여졌다.   

이 와중에 왜군 한 명이 이순신에게 조총을 쏘았다. 이순신은 탄환을 맞았다. 치명상이었다.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회과 조카 완이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곁에 있던 송희립이 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유해를 옷으로   가린 다음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 참고문헌 )

o (사)이충무공유적 영구 보존회, 정유재란과 왜교성 전투, 2014  

o 정명섭 외 4인, 조선전쟁 생중계, 북하우스, 2011

o 제장명 지음, 이순신 백의종군, 행복한 나무, 2011   

o 김세곤,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평전, (사)체암 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 2022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책문, 2012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