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독일 프랑크푸르트(44) 슈테델 미술관- 독일 표현주의 화가 키르히너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독일 프랑크푸르트(44) 슈테델 미술관- 독일 표현주의 화가 키르히너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5.05.27 04:00

인상주의 전시실을 보고나서 다른 전시실로 이동하였다. 여기에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 · 오토 뮐러 등 독일 표현주의 화가와 마르크 샤갈 그리고 앙리 마티스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먼저 독일 표현주의 그림부터 감상하자. 첫 번째 그림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의 그림이다.
그림은 모자를 쓴 나체의 여인이다. 음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선정적이다. 아마 나치는 이 그림을 퇴폐적이라고 했으리라. 그런데 안내문 사진을 제대로 찍지 않아서 제작년도 등을 알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이 그림은 드레스덴 시기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15분 누드 스케치" 라는 방식을 통해 사람의 몸을 보고 느껴지는 첫인상을 포착해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했다. 강렬한 원색조의 색채, 원시적이고 과장된 형태의 작품들이었다.

키르히너는 1901년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해 건축학을 배웠다. 틈틈히 그는 회화를 공부했는데 스승은 아르누보(유겐트슈틸) 운동의 중심인물인 헤르만 오브리스트였다.
키르히너는 25세인 1905년 6월 7일에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 건축학도였던 에리히 헤켈(1883~1970),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1884~1976), 블라일과 함께 드레스덴에서 ‘다리파(브뤼케 Die Brücke)’를 창설했다. 키르히너의 설명에 따르면 그룹의 명칭은 ‘미래로 가는 다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독일 각지에 있는 젊은 세대가 널리 결집하기 위하여 다리를 건넌다는 뜻이다.
이는 네 명의 화가가 좋아하는 니체(1844~1900)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883~1885)』에 종종 나오는 ‘초인을 향한 다리’라는 표현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진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새로운 창조자와 관람자 세대가 도래했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젊은이를 부른다.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로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는 기득권에 대항하여 행동과 삶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 창조의 충동을 왜곡하지 않고 직접 표현하는 사람은 모두 우리 편이다." (다리파 창립선언문)
다리파 창립 선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다리파 화가들은 사회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살아가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원했다. 그리고 문명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예술의 사명이라 믿었다.
다리파는 이미 시들어버린 전통적 아카데미아 미술을 폐기하고, 이성이 아닌 본능, 꿈과 환상, 원시성, 광기의 세계를 탐사해 잃어버린 생명력을 되살리려 했다.
다리파는 1906년 가을 기업가 세이페르트의 후원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런데 미술 평론가와 관객들은 적대적이고 냉소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파는 꾸준히 전시회를 열었다.
1911년 가을, 키르히너와 로틀루프, 헤켈은 드레스덴을 떠나 베를린으로 이사하여 또 다른 다리파 화가 오토 뮐러(1874-1930)와 헤르만 막스 페히슈타인(1881-1955)을 만났다.
키르히너는 베를린에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드레스덴과 너무 다른 것에 적잖이 놀랐다. 베를린에서 그는 작품의 주제를 대도시 풍경으로 옮겼다. 대도시 삶의 긴장감과 비자연성, 방탕성, 갈등, 병든 사회의 위기감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키르히너는 군대에 자원 입대했으나 군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건강이 악화되자 쾨니히스타인의 요양소에서 생활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군인 모습의 자화상>을 감상하여 보자. 키르히너의 어깨에는 75연대 견장이 달려있다. 군복과 모자는 군인으로서의 강하고 권위적인 군청색으로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나,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얼굴은 불안하고 우울한 표정이고 손목은 잘려있다. 게다가 뜬금없이 벌거벗은 여자가 뒤에 서 있다.

1917년에 키르히너는 스위스 다보스 근처 프라우엔키르슈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그의 그림도 한결 차분해지고 단순화되어 알프스 산의 풍경과 소박한 농부의 모습, 그리고 친구들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그러나 1933년에 정권을 잡은 나치는 키르히너를 ‘퇴폐 미술가’로 규정했다. 1937년에 나치 정권은 뮌헨에서 선전용으로 ‘퇴폐미술전’을 열면서 여기에 키르히너를 포함시켰고, 키르히너의 작품의 전시 및 거래를 금지하고 600점이 넘는 작품들을 미술관에서 철거, 파괴시켰다.
절망에 빠진 키르히너는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1938년 6월 15일에 자살했다. 향년 58세였다.
< 참고문헌 >
o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 · 최병진 옮김, 표현주의 화가들. 마로니에 북스, 2009
o 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 김소연 옮김, 표현주의, 마로니에북스,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