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회]김세곤의 독일 슈테델미술관 기행-꽃으로서의 고급 창녀의 이상적 초상화
-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5.04.1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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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감상한 후에, 바르톨로메오 베네토(1502∽1530)가 1520년에 그린 초상화를 감상한다.

그림은 미모의 여인이 오른손에 꽃 한 송이를 들고 있다. 보석으로 치장한 그녀는 머리에 월계수 가지와 하얀 숄을 두르고 있고, 왼쪽 젖무덤이 아예 보인다.
관람객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상당히 고혹적(蠱惑적) 이다. 그런데 그림 제목이 ‘꽃으로서의 고급 창녀의 이상적 초상화(Idealized Portrait of a Courtesan as Flora) ’이다.
아니, 도대체 이 여인이 누구이길래 ‘고급 창녀의 초상화’란 제목이 붙어있을까?
<위키 백과>와 tvN방송의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았더니, 뜻밖에도 그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31∽1503,재위1492-1503)의 외동딸이자, 마키아벨리(1469∽1527)가 『군주론』에서 이상적 군주의 전형으로 소개한 인물인 체사레 보르지아(1475∽1507)의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480~1519)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부친 교황 알렉산데르 6세, 그리고 오빠 체사레 보르지아와 근친상간한 여자로 악평이 났다.
그러면 교황 알렉산드로 6세부터 알아보자. 그는 로마 교황 역사상 최악의 탐욕과 불륜의 교황이란 오명을 쓴 자이다.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명의 정부(情婦)를 거느렸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자식만 8명이었다.
스페인 출신인 알렉산데르 6세의 본명은 로드리고 보르지아인데 대귀족 보르지아 가문에서 태어났다.
교황 갈리스토 3세의 조카인 탓에 그는 20대 중반에 추기경이 되었고, 2년 뒤에는 발렌시아 주교가 되었다.
1492년에 보르지아는 인노첸시오 8세가 사망하자 추기경들을 돈과 섹스로 포섭하여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추기경 시절부터 여러 애인과 혼외자를 뒀을 정도로 타락한 성직자였지만, 당시 교황청 고위인사들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교황청에서 50여 명 전라의 여성이 추기경들에게 성적 연회를 베풀었다. ‘밤의 연회’(Banquet of Chestnuts)였는데, 알렉산데르 6세와 아들 체사레는 황홀경에 빠진 추기경들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이어서 알렉산데르 6세는 장남 체사레를 추기경으로, 차남 지오반니를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지오반니가 살해당하자 체사레는 교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한편 알렉산데르 6세는 정략결혼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려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절세미인인 외동딸 루크레치아를 이용하였다.
알레산데르 6세는 1493년에 밀라노 공국과 동맹을 맺고자 13세의 루크레치아를 공작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밀라노의 쇠퇴를 재빨리 알아차린 교황은 조반니가 성불능이라는 이유로 혼인 무효를 주장하였다. 조반니는 혼인 무효를 거절하며 ‘루크레치아가 아버지와 오빠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소문을 퍼트렸지만 곧 굴복하였다.
교황의 제안을 거절하면 스포르차 일족은 멸족당할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에 조반니는 증인들 앞에서 성불능을 인정하는 서류와 혼인 무효 서류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혼인 무효 과정이 길어지는 동안 루크레치아는 교황의 심부름꾼 페로토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잉태하였다.
그녀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산 시스토 수녀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1498년 2월에 티베르 강에서 페로토와 하녀 판타실레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1501년에 아이에 대한 두 개의 교황 교서가 반포되었는데, 첫 번째 교서에는 체사레의 결혼 전에 낳은 아이로 인정하였고, 두 번째 교서에는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아라곤의 알폰소(나폴리 국왕의 서출) 공작이었다.
그러나 알폰소의 정치적 가치가 떨어지자 체사레에 의해 살해당하였는데, 체사레와 루크레치아가 근친상간한다는 추문도 함께였다.
이어서 루크레치아는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사랑은 없고 정략만 가득한 결혼이었다. 두 사람은 ‘쇼 윈도’에 불과한 결혼 관계를 이어갔다.
루크레치아는 남편 동생인 프란체스코와 거리낌 없이 사랑을 나누었고, 추기경·프랑스 군인도 애인으로 삼았다.
19세기에 들어서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1802-1885)는 루크레치아에게 ‘고급 창녀’에 더하여 독약이 든 반지를 끼고 다니면서 사람을 죽이는 ‘독살녀’라는 오명까지 추가했다.
한편 현대에 와서 루크레치아가 ‘정략결혼에 희생된 고급 창녀’로 부각된 것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3부작(29회) 미국 드라마 <더 보르지아>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