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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호남 정신 1회

1.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 박상과 조광조의 인연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후일 저 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 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無等山前曾把手     무등산전증파수

牛車草草故鄕歸     우차초초고향귀

他年地下相逢處     타년지하상봉처

莫說人間謾是非     막설인간만시비


  기묘사화가 일어난 이듬해인 1520년 봄,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에 귀양 와서 사약을 받고 죽은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의 시신이 경기도 용인으로 떠나간다.


   눌재 박상(朴祥 1474-1530)은  그의 관이 실린 소달구지를 먼발치로 보면서 만시 挽詩를 짓는다. 시 제목은 ‘효직의 상을 당하여 逢孝直喪’ (효직은  조광조의 자 이다.)이다. 상여 줄을 끌면서 만가를 부르듯이 시가 매우 애절하고 장엄하다.


   이 시의 첫 1구, 2구는 박상과 조광조와의 과거와 현재의 인연 이야기이다. 1519년 11월 박상은 무둥산 앞 분수원 (지금의 광주 남문 밖)에서 유배 내려오는 조광조를 만나 슬픔을 나누웠다. 그 때 그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시를 건넨다.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잡고 헤어졌을 때

그대가 조정에서 일하다가 귀양살이 옴을 이상하게 여겼노라

귀양살이와 조정에서 벼슬함을 구별하지 마소

저승에 가면  아무런 차등이 없는 것이니.



分水院前曾把手           분수원전증파수

愧君黃閣落朱崖           괴군황각낙주애

朱崖黃閣莫分別           주애황각막분별

纔到九原無等差           재도구원무등차




  그런데 조광조는 유배 온지 한 달도 못 되어 사약을 받았고 그의 친구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수습한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서 바삐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비참하고 애달프다.


    3구와 4구에서는 두 사람이  내세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면서 그때에는  현세에서의 부질없는 시비 是非는 하지 말자고  읊는다. 여기에서 시비란  그가 겪었던 신비복위소 사건과 조광조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급진적 개혁정치를 말한다.

 

    1515년 8월, 당시 담양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폐위된 중종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순창군 강천사 삼인대에서 올렸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며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신수근은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박원종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 까 보아 신씨를 7일 만에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1515년 3월초에 장경왕후 윤비가 인종을 낳은 후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박상등은 신비 복위소를 올린 것이다. 그리고 조강지처를 폐위시킨 박원종등의 행위는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므로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조정은 이 상소로 인하여 논쟁에 휩싸였다. 박상과 김정등은 중벌에 처해질 분위기이었으나 조광조의 간언으로 박상은 전라도 남평으로 김정은 충청도 보은으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한편 이 상소는 사림들의 의리정신을 일깨워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기묘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조광조에 대한 시비 是非는 곧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대한 시비를 말한다. 1518년에 대사헌이 된 조광조는 중종을 설득하여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훈구 외척 공신들의 공훈을 3/4이상 삭탈하는 조치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혁정치는 보수 세력인 훈구파의 반발을 크게 사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38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

    

   박상은 1474년 5월18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지홍은 원래 충청도에서 살았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인 광주 방하동(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와서 살았다.


   박상은  28세인 1501년에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30세에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파이었다. 박상은1505년에 전라도 도사(종6품)로 근무하게 된다. 이 때 나주에 연산군의 애첩인 딸의 권세를 믿고 남의 전답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우부리 牛夫里라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권력 앞에서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박상은 분노하였다. 그는 나주 금성관에서  우부리를 매질하였다. 그런데  너무 심하여 목숨까지 빼앗고 말았다. 중종반정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박상은 화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다행히도 박상은 그를 체포하기위하여 내려오던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려 목숨을 구한다. 야사 野史에는 박상이 정읍을 지나 10리쯤 가는 데 고양이 한 마리가 묘한 흉내를 하면서 큰 길을 피해 샛길로 들어가자 이상하여 따라갔다는 것이다.    


  박상은 호남 유학의 종조 宗祖이고 강개 慷慨의 절의파 선비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정조임금이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시를 잘 썼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에도 박상은 뛰어난 시인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임억령, 송순, 정만종등 당대의 거출한 문인들을 제자로 배출하였다.  



근세의 시인은 호남에서 많이 나왔다. 눌재 박상 , 석천 임억령, 금호 임형수,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사암 박순,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제봉 고경명등은 남달리 우뚝 뛰어난 사람들이다. 

                                   <지봉유설- 권14 문장부>



    완절 完節(절의를 완성하려고 노력한)의 선비 박상을 만나려면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 寺洞마을, 일명 절골을  가면 된다. 거기에는 그의 생가터와 재실 그리고 묘소가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에는 그의 영정이 있다.

 

                                (2010.2.6 다시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