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윽한 ‘매형’의 향기
매화에 관한 주옥같은 시와 산문, 고운 그림이 담긴 <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
사진/오경석의 <선면홍매>.
“매화 본성이 하 정결터니 달빛 어리니 물인 듯하이.(梅花本瑩然 映月疑成水)
눈서리 흰 살결 고움을 도와 맑고 싸늘함이 뼈에 시리다.(霜雪助素艶 淸寒徹人髓)
너를 대해 내 맘을 씻나니 오늘밤은 앙금 하나 없구나!(對此洗靈臺 今○無點◇) ”
**○는 갓머리에 肖자가 아래 있는 자
**◇는 삼수변에 幸자임.
율곡 선생이 매화 가지에 밝은 달이 어리는 모습을 그린 한시다.
군자의 벗 사군자에서도 첫머리에 오르는 으뜸은 매화였다. 매화는 다른 모든 풀과 나무가 새싹을 움틔우기 이전인 추운 겨울, 하얀 눈 속에서 홀로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꽃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매화를 ‘백훼(百卉)의 으뜸’으로 치며 그 모습을 닮고자 해 매화를 곁에 두고 즐겼다. 매화는 주군에 대한 선비의 충성과 고절의 표상이자 봄의 상징이었으며, 그립고 아름다운 이를 뜻했다. 그리고 달과 매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매월상조’(梅月相照)의 풍경은 고아한 풍취가 어리는 가장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많은 글과 그림의 소재로 사랑받아왔다.
조상들의 각별했던 매화사랑
사진/조희룡의 <홍매대련>.
우리 조상들의 매화사랑은 각별했다. 그래서 매화를 사랑하던 선비들은 매화를 그냥 매화로 부르지 않고 ‘매형’(梅兄)이라 불렀을 정도다. 조선 전기 문인 이행은 “매형 성품이 스스로 맑아 비낀 달빛을 되비쳐 주네. 서로 보아 둘다 사특함이 없으니 시경 삼백편에 맞먹을 만하구나!”라며 매화를 동양사상 최고의 정수인 <시경>에 비견했을 만큼 사랑했다.
재미있는 점은 매화의 원산인 중국에서보다 우리 땅에서 매화가 더 사랑받았다는 점이다. 중국 시인 도연명은 사군자에서도 국화를 끔찍이 사랑했고, 성리학자 주돈이가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고 평하기는 했어도 정작 중국에서 매화를 이토록 사랑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매화는 조선에서 단연 최고의 꽃으로 사랑받았던 것이다. 특히 매화시 104편을 묶은 <매화시첩>을 펴냈던 퇴계 이황의 매화사랑은 단연 으뜸이다. 도산서원 한 구석에 매화를 심어 즐겼던 퇴계는 말년 병이 위중해지자 “깨끗하지 못한 모습을 ‘매형’에게 보일 수 없다”고 매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는가 하면, 유언마저도 매화분에 물 주라는 한마디였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이토록 각별했던 매화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많은 시와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정수를 추린 새 책이 나왔다. 한문학자 손종섭씨가 엮고 옮겼고, 한국매화연구원 원장을 지낸 매화분재 애호가 안형재씨가 찍은 사진을 담은 <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학고재 펴냄·1만3천원)이다. 매화를 소재로 한 조선조 그림도 함께 실어 운치를 더해 보고 읽는 맛이 뛰어난 시화집이다.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화를 주제로 하는 우리 조상들의 시가 140편과 산문 7편을 담았다. 지은이는 “고인의 매화사랑이 이처럼 각별하고, 그 읊은 시가 수천을 헤아림에 이르러서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모두가 또한 주옥이라, 선정하는 데도 망설임이 많았다”고 밝혔다.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모처럼 잊고 살았던 옛 글의 아름다움과 요즘에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매화 사진과 그림을 만나는 것이다. “선비집 가난이야 오래된 일이지만 네 다시 아 주어서 다시 맑음 얻었네라”고 했던 남명 조식의 시며, “너의 그 맑은 향기로 해서 천지의 봄임을 깨달았나니”했던 강희맹, “그윽한 그 향기는 코를 통해 빌어 오고 나머지 맑은 기운 시사(詩思)로 들어온다”던 서거정 등 매화에 관한 절창들이 고운 그림과 함께 술술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