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소나무 사랑
[숲이 희망이다] 25. 한시 속의 숲 | ||
[경향신문 2004-11-15 18:42] | ||
16세기의 이름난 문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집은 도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분천(汾川) 강가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멀리 청량산(淸凉山)이 바라다 보인다. 그런데 그 집 앞에 소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시야를 가려 청량산이 온전하게 보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소나무를 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현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소나무가 있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청량산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망령된 생각을 막는다는 뜻으로 두망대(杜妄臺)라 이름하였다. 이렇게 사는 것이 운치 있는 삶이다. 조선을 개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라 하면 혁명가를 떠올리지만, 정도전은 참으로 산과 숲을 아낀 사람이다. 그는 이런 시를 지었다.
삼봉 아래 부서진 집
돌아오니 솔밭길이 가을이라.
가난하여 병 고치기 어렵지만
차분하여 근심 잊기 알맞다네.
대숲을 보호하려 길을 둘러 내었고
산을 아껴 누를 작게 세웠네.
이웃 중이 글을 물으러 와
온종일 그를 잡아둔다네.
弊業三峰下 歸來松逕秋
家貧妨養疾 心靜足忘憂
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
隣僧來問字 盡日爲相留
-정도전, ‘산중에서(山中)’
시성(詩聖)이라는 일컬음을 받은 두보(杜甫)도 대나무를 좋아하였다. 그렇지만 두보는 자신이 살 집을 짓기 위해 대나무를 베어내었고, 또 길을 내기 위해 대나무를 베어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약을 사먹을 돈은 없지만 마음이 편안하니 근심이 없다. 이러한 혜택을 주는 산이기에 정도전은 산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대숲을 망가지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길을 빙 둘러 내고, 스카이라인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그맣게 집을 세운 것이다. 산 밑에 높게 세운 빌딩, 강물을 막고 서 있는 아파트, 이러한 참상에 경종을 올리는 시다.
내가 태어나 자란 남쪽 땅은 마을 뒤에 대숲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맑은 소리가 울린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절로 맑아진다. 옛사람들도 대나무를 좋아하여 그 곁에 집을 지었으리라. 게다가 맑은 대숲 푸른 그림자 아래에서 책을 읽는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고향으로 내려가 절조를 지키면서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남은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그러한 여유를 누렸다.
개울가 초가에 홀로 한적하게 사노라니
밝은 달 맑은 바람 흥이 절로 넉넉하다
손님이 오지 않고 산새들만 우는데
대밭으로 평상을 옮기고 누워 책을 보노라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길재, ‘나의 뜻(述志)’
개울가에 집을 짓고 한적하게 사노라니, 그저 산새만 벗이 될 뿐이다. 지겨우면 대밭에 평상을 깔고 누워서 책을 읽는다. 현대문명에 찌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삶은 꿈이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맹인은 본 것이 없기 때문에 꿈을 꾸지 않는 것처럼, 아름다운 산수를 그린 글이나 그림을 보지 않으면 산수 사이에서 노니는 흥취를 상상해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처럼 현대문명으로 인하여 ‘맹인’이 된 사람이 꿈을 꾸려면, 숲속에서 운치 있게 산 옛사람의 시나 글이 필요하다. 이런 뜻으로 길재의 시를 읽어보라.
길재는 대숲에서 책을 들었다. 그렇지만 굳이 책을 들지 않은들 어떠랴. 조선 중기의 문인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책 대신 거문고를 들었다. 그리고 산수화 속에 그려진 사람이 되었고, 무릉도원의 신선이 되었다. 다음 글은 숲을 보지 못하는 ‘맹인’을 위한 청언(淸言)이 될 만하다.
봄이 다하려 할 때 숲속으로 걸어가면 굽은 길이 호젓한 곳으로 통하여 솔과 대가 어리비친다. 들꽃은 향기를 뿜고 산새는 혀를 놀리는데 거문고를 끼고 바위에 앉아 두어 좋은 곡조를 탄다. 그러면 몸이 변하여 문득 선경 속의 신선이 되고, 그림 속의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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