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눌인 조광진 약력

김세곤 2006. 11. 15. 16:47

 

 

 

 

  

조광진(曺匡振)
간략정보
시대 조선
생몰년 1772-1840(영조48-헌종6)
본관 용담(龍潭)
정보(正甫)
눌인(訥人)
활동분야 명필
조광진(曺匡振)에 대하여

조광진(曺匡振)
1772(영조 48)∼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명필. 본관은 용담(龍潭). 자는 정보(正甫), 호는 눌인(訥人).
평양에 살았고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조눌인묘지 曺訥人墓誌〉에 “집이 가난하여 사방으로 다니며 글씨를 배웠다. 처음에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고, 만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터득하였다. 행(行)·초(草)는 청의 유용(劉墉)을, 지예(指隷)는 장도악(張道渥)을 따랐다.”고 한다.
신위(申緯)와 김정희(金正喜)가 크게 추허(推許)하였는데, 김정희는 “창아기발(蒼雅奇拔)하고 괴위정특(怪偉挺特)하니 압록강 이동에 일찍이 없었다.”고 하였다.
특히, 전(篆)·예(隷)에 금석기(金石氣)가 보이며 고법(古法)의 임모(臨摸)에 뛰어났는데, 당시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비첩(碑帖)과 청국 명인들의 작품을 보고 비로소 새로운 경지로 나갈 수 있었다. 유한지(兪漢芝)·김정희와 함께 조선시대 예의 대가이다.
서첩으로 《조눌인법첩 曺訥人法帖》·《눌인서첩 訥人書帖》 등이 전하며, 《근묵 槿墨》·《근역서휘 槿域書彙》 등에 그의 진적이 보인다.

 

 

 

[설왕설래]曉鳥

[세계일보 2005-01-28 20:15]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의 수필 ‘曉鳥’(효조·새벽새)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선생인 조광진이 잠자리에서 갓 깨어나 뜰 앞 나무 가지에서 재재거리는 참새들을 보고 필흥이 일어 ‘曉鳥’를 단숨에 써 젖혔다. 새조의 아래 점 4개를 감싸는 지킴이 제대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축 처진 게 마음에 걸려 내팽개쳐두었다. 10년 뒤 중국 여행길에 한 고관대작의 집에 들렀더니 그 글씨가 사랑에 걸려 있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처진 지킴을 살짝 올렸다. 돌아온 주인이 노발대발하자 선생이 “그게 내 글씨인데 마음에 거슬려 그랬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주인은 “무슨 소리냐, 잠에서 갓 깨어난 새가 무슨 흥이 있어 꼬리가 올라가겠느냐”며 끝내 글씨를 내다버렸다 한다.
‘광화문’이냐 ‘光化門’이냐는 논쟁을 보고 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새 광화문의 현판은 정조대왕이나 김정희의 글자를 모은 ‘집자(集字)’로 하겠다고 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우리나 중국의 문자는 서양 알파벳과 달리 서예라는 장르로까지 발전되었고, 소위 개칠(가필)도 허용 않는다. 연전에 유 청장의 책에 오류가 많다고 했을 때 유 청장의 대중적 인기를 시샘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이번 집자 구상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유 청장은 또 시비가 번지자 ‘아부할 줄 몰라 10여년을 백수로 지낸’ 자신을 언론이 ‘아부쟁이’ ‘어용학자’로 몰고 있다며 그의 꿈은 ‘지조 있는 학자’‘양심 있는 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인생관까지 들먹인다.

‘지조’가 이렇게 값싼 단어인 줄은 미처 몰랐다. 조지훈 선생은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이 아랑곳없으리라”고 했다. 10년 백수가 지조의 보증수표일 수는 없다. 선생의 ‘지조론’ 일독을 권한다.

조병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