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스크랩] 秋史와 그 書派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김세곤
2006. 11. 15. 16:29
지금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추사와 그 학파들>이란 기획전이 전시되고 있답니다. 여러 독자들의 감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이십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추사와 그 서파들>이란 기획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대학2년의 초보딱지를 달고 다니던 감상자에 불과하였습니다. 도록의 작은 사진으로나 볼 수 있었던 추사의 진품을 실제로 본다는 설렘과 추사의 영감을 받아 저의 서예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나름대로 심미하려 애를 썼을 겁니다. 그러나 겨우 해행을 습작하던 수준의 나의 눈에는 이단의 글씨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등교과에서 부터 추사체의 명성과 그 독창성. 그리고 서체사적 위치를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의 감상은 떨떠름한 아쉬움이었던 것입니다. 전예나 북위비의 조예가 전무했던 저로서는 추사체의 拙朴淸古의 妙境을 감상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어느날, 선배들과 함께 추사도록과 一中, 如初, 劍如 그리고 현 서예가들의 도록을 주욱 펼쳐놓고 감상하면서 추사와 제 서예가들의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느껴진다는 공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이십년, 전시회를 보고 싶지만 볼 수 있을런지 알 수 없고 책장에서 빛바랜 도록들을 몇권 꺼내 보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계간미술의 한국의 미 17권 추사 김정희>
<간송문화 2, 3, 19, 24, 27, 30권>
그런데 전에 추사와 현대 서예가들 사이에서 느꼈던 격차를 다시금 추사서파에서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같은 어설픈 감상자에게서도 느껴지는 확연한 격차를 추사의 학문적 성취와 천재성으로만 미루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論旨는 추사서파들이 추사를 따르나 많은 격차로 범접하지 못하는 이유를 추측하는 것입니다.
추사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청의 옹방강과 완원등 북학파의 서론을 바탕으로 북비와 남첩의 서체를 터득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 漢隸의 묘리에 통달하는 서도수련을 거쳐 드디어 한예에 바탕을 두고 있는 모든 서체의 特長을 겸비한 추사체를 이루어냅니다. 그 추사체는 중국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전대미문의 충격을 던져 중국의 많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국내에서도 백여년간 주름잡아온 東國眞體를 일거에 소거하고 추사풍이 풍미하게 됩니다.
추사서파의 면면을 보면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 이제 권돈인, 황산 김유근, 산천 김명희, 금미 김상희, 우봉 조희룡, 우선 이상적, 난석 박희용, 위당 신헌, 석파 이하응, 고람 전기, 소당 김석준 등입니다. 이들 모두가 당시의 명가로서 손색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학문과 서예에 대한 광적인 아취는 21세기 서예인들의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평가에서 외람된 실례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그 한계는 무엇일까? 새로운 서풍의 창신은 득도의 어려움이겠지만 그것을 모사 추종함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추사서파들 중에는 청출어람은 차제하고 많은 격차로 추사에 미치지 못하게는 그 한계는 무엇일까?
<간송문화 24권 추사묵연>의 권말에 붙은 정병화선생의 '추사의 불교학'이란 논문을 읽게 되었는데 선생은 추사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사의 불교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성리학 일변도의 폐쇄적 사상 경향에서 벗어나 북학의 정수를 이어 대성한 추사는 큰 걸림없이 불교에 접하게 된다. 가문의 본래 경향도 그러하거니와 당시 국내의 사상적 동향 그리고 중국의 분위기에서도 추사에게 미친 禪風 취향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추사는 단순히 호의적 대상으로서만 불교를 대한 것이 아니라 禪理를 깊이 탐구하고 典籍을 두루 섭렵하여 당대 禪門宗長 白波를 통타하는 치밀한 왕복토론을 벌일 만큼 학문적 고증을 가한다. 뿐만아니라 생활 속에 茶禪一如의 풍토를 끌여들여 흉중의 일기를 함양함으로서 문필의 배경을 삼으니 그의 탈속한 예술세계는 바로 禪藝의 경지라 해야 할 것이다."
저는 위 글을 읽고서야 추사서파의 한계는 바로 '禪(참선할)'이 아닐까 하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추사를 따랐으나 추사의 가늠할 수 없는 서권기와 서화에 선의 이입을 하는 일체적 경지인 선예에는 미치지 못함이 추사서파들의 한계였다고 정리합니다.
그럼 禪은 무엇일까? 선은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서 진실의 지혜, 연기의 이법을 체득하기 위한 정신수행법으로서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시켜 고요히 심려하는 것이라 합니다. 선문답같은 애매한 표현을 대신할 말을 찿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 속된 말로 '글씨의 속기를 없엔다'라는 말이 있는데 적당할런지. 사실 저는 불교의 문외한이기에 이 정도의 모호한 말로 얼버무리고 말렵니다.
저는 다시 도록을 펼치고 草衣禪師와의 일화로 유명한 <茗禪>, 그리고 <史野>, <잠계>, <계산무진>, <노화잔수>, <숭정금실> 등의 편액을 보면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추사의 天眞性을 느낍니다. 바로 이 천진성이야말로 추사가 선문에서 체득한 선예의 경지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이제 추사의 작품 중에 선예의 경지를 보여주는 글로서 마무리 하렵니다.
"오직 圖書를 사랑하되 古器도 아울러 하며, 또 文字를 가지고서 菩提(보리)에 든다."
--- 저의 짧은 생각에 도움을 기다립니다.
이십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추사와 그 서파들>이란 기획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대학2년의 초보딱지를 달고 다니던 감상자에 불과하였습니다. 도록의 작은 사진으로나 볼 수 있었던 추사의 진품을 실제로 본다는 설렘과 추사의 영감을 받아 저의 서예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나름대로 심미하려 애를 썼을 겁니다. 그러나 겨우 해행을 습작하던 수준의 나의 눈에는 이단의 글씨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등교과에서 부터 추사체의 명성과 그 독창성. 그리고 서체사적 위치를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의 감상은 떨떠름한 아쉬움이었던 것입니다. 전예나 북위비의 조예가 전무했던 저로서는 추사체의 拙朴淸古의 妙境을 감상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 어느날, 선배들과 함께 추사도록과 一中, 如初, 劍如 그리고 현 서예가들의 도록을 주욱 펼쳐놓고 감상하면서 추사와 제 서예가들의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느껴진다는 공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이십년, 전시회를 보고 싶지만 볼 수 있을런지 알 수 없고 책장에서 빛바랜 도록들을 몇권 꺼내 보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계간미술의 한국의 미 17권 추사 김정희>
<간송문화 2, 3, 19, 24, 27, 30권>
그런데 전에 추사와 현대 서예가들 사이에서 느꼈던 격차를 다시금 추사서파에서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같은 어설픈 감상자에게서도 느껴지는 확연한 격차를 추사의 학문적 성취와 천재성으로만 미루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論旨는 추사서파들이 추사를 따르나 많은 격차로 범접하지 못하는 이유를 추측하는 것입니다.
추사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청의 옹방강과 완원등 북학파의 서론을 바탕으로 북비와 남첩의 서체를 터득하고 더 거슬러 올라가 漢隸의 묘리에 통달하는 서도수련을 거쳐 드디어 한예에 바탕을 두고 있는 모든 서체의 特長을 겸비한 추사체를 이루어냅니다. 그 추사체는 중국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전대미문의 충격을 던져 중국의 많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국내에서도 백여년간 주름잡아온 東國眞體를 일거에 소거하고 추사풍이 풍미하게 됩니다.
추사서파의 면면을 보면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 이제 권돈인, 황산 김유근, 산천 김명희, 금미 김상희, 우봉 조희룡, 우선 이상적, 난석 박희용, 위당 신헌, 석파 이하응, 고람 전기, 소당 김석준 등입니다. 이들 모두가 당시의 명가로서 손색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학문과 서예에 대한 광적인 아취는 21세기 서예인들의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평가에서 외람된 실례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그 한계는 무엇일까? 새로운 서풍의 창신은 득도의 어려움이겠지만 그것을 모사 추종함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추사서파들 중에는 청출어람은 차제하고 많은 격차로 추사에 미치지 못하게는 그 한계는 무엇일까?
<간송문화 24권 추사묵연>의 권말에 붙은 정병화선생의 '추사의 불교학'이란 논문을 읽게 되었는데 선생은 추사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사의 불교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성리학 일변도의 폐쇄적 사상 경향에서 벗어나 북학의 정수를 이어 대성한 추사는 큰 걸림없이 불교에 접하게 된다. 가문의 본래 경향도 그러하거니와 당시 국내의 사상적 동향 그리고 중국의 분위기에서도 추사에게 미친 禪風 취향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추사는 단순히 호의적 대상으로서만 불교를 대한 것이 아니라 禪理를 깊이 탐구하고 典籍을 두루 섭렵하여 당대 禪門宗長 白波를 통타하는 치밀한 왕복토론을 벌일 만큼 학문적 고증을 가한다. 뿐만아니라 생활 속에 茶禪一如의 풍토를 끌여들여 흉중의 일기를 함양함으로서 문필의 배경을 삼으니 그의 탈속한 예술세계는 바로 禪藝의 경지라 해야 할 것이다."
저는 위 글을 읽고서야 추사서파의 한계는 바로 '禪(참선할)'이 아닐까 하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추사를 따랐으나 추사의 가늠할 수 없는 서권기와 서화에 선의 이입을 하는 일체적 경지인 선예에는 미치지 못함이 추사서파들의 한계였다고 정리합니다.
그럼 禪은 무엇일까? 선은 사전적 의미로 불교에서 진실의 지혜, 연기의 이법을 체득하기 위한 정신수행법으로서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시켜 고요히 심려하는 것이라 합니다. 선문답같은 애매한 표현을 대신할 말을 찿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 속된 말로 '글씨의 속기를 없엔다'라는 말이 있는데 적당할런지. 사실 저는 불교의 문외한이기에 이 정도의 모호한 말로 얼버무리고 말렵니다.
저는 다시 도록을 펼치고 草衣禪師와의 일화로 유명한 <茗禪>, 그리고 <史野>, <잠계>, <계산무진>, <노화잔수>, <숭정금실> 등의 편액을 보면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추사의 天眞性을 느낍니다. 바로 이 천진성이야말로 추사가 선문에서 체득한 선예의 경지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이제 추사의 작품 중에 선예의 경지를 보여주는 글로서 마무리 하렵니다.
"오직 圖書를 사랑하되 古器도 아울러 하며, 또 文字를 가지고서 菩提(보리)에 든다."
--- 저의 짧은 생각에 도움을 기다립니다.
출처 : 먹물이 글씨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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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눌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