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인 조광진
눌인 조광진이 명필임을 오늘 처음 알았다. 그에대한 연구를 하려한다.
조광진(曺匡振) |
본관(本貫) |
용담(龍潭) | |||
시대(時代) |
1772(영조 48)∼1840(헌종 6) |
자(字) |
정보(正甫) |
호(號) |
눌인(訥人) |
이력(履歷) |
1772(영조 48)∼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명필. 본관은 용담(龍潭). 자는 정보(正甫), 호는 눌인(訥人). 평양에 살았고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조눌인묘지 曺訥人墓誌〉에 “집이 가난하여 사방으로 다니며 글씨를 배웠다. 처음에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고, 만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터득하였다. 행(行)·초(草)는 청의 유용(劉墉)을, 지예(指隷)는 장도악(張道渥)을 따랐다.”고 한다. 신위(申緯)와 김정희(金正喜)가 크게 추허(推許)하였는데, 김정희는 “창아기발(蒼雅奇拔)하고 괴위정특(怪偉挺特)하니 압록강 이동에 일찍이 없었다.”고 하였다. 특히, 전(篆)·예(隷)에 금석기(金石氣)가 보이며 고법(古法)의 임모(臨摸)에 뛰어났는데, 당시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비첩(碑帖)과 청국 명인들의 작품을 보고 비로소 새로운 경지로 나갈 수 있었다. 유한지(兪漢芝)·김정희와 함께 조선시대 예의 대가이다. 서첩으로 《조눌인법첩 曺訥人法帖》·《눌인서첩 訥人書帖》 등이 전하며, 《근묵 槿墨》·《근역서휘 槿域書彙》 등에 그의 진적이 보인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 澗松文華 19―秋史書派考―(崔完秀, 韓國民族美術硏究所, 1980). 〈李完雨〉 |
조선 후기의 서예가.
본관 : 용담(龍潭)
호 : 구눌(口訥) ·눌인(訥人)
별칭 : 정보(正甫)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평양(平壤)
주요작품 : 《조눌인법첩(曺訥人法帖)》 《눌인서첩(訥人書帖)》
본관 용담(龍潭). 자 정보(正甫). 호 구눌(口訥) ·눌인(訥人). 평양(平壤) 출생.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우고 만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터득하였다. 특히 고법을 임모(臨模)하는 데 특출하였고 행초(行草)는 유석암(劉石菴)과 같았으며 예서(隸書)는 장수옥(張水屋)을 닮았다.
쾌재정(快哉亭) 편액(扁額)의 글씨가 그의 예서였는데 중국 사신이 보고 크게 놀라 한 번 만나보기를 청하니 죽었다고 하자 섭섭히 여겨 100본을 찍어 갔다. 당시의 명필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서첩으로 《조눌인법첩(曺訥人法帖)》 《눌인서첩(訥人書帖)》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