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후손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6회 김일손, 악가(樂歌)에 대하여 진술하다. 입력 2024.06.07 16:15 댓글 0

김세곤 2025. 1. 15. 18:26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6회 김일손, 악가(樂歌)에 대하여 진술하다. 입력 2024.06.07 16:15 댓글 0

 

1498712, 창덕궁 희정당 앞 뜰에서 김일손을 친국한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네가 또 악가(樂歌)에 대한 일을 썼는데, 어느 곳에서 들었느냐?"

 

김일손이 아뢰었다.

 

"비록 동요(童謠)라 할지라도 옛사람이 또한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이것까지 아울러 실었습니다. 후전곡(後殿曲)은 슬프고 촉박한 소리온데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여, 가동(街童) 항부(巷婦)라도 또한 모두 노래하였습니다.

신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항상 염려하는 터이온데, 급기야 사가(賜暇)를 받아 독서당(讀書堂)에 있을 적에 성종께서 술과 안주를 내려주셨습니다. 신은 그 여물(餘物)을 가지고 배를 띄워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기에 무풍정(茂豊正) ()을 불렀더니, ()이 거문고를 안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연주하므로, 신이 총에게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느냐?’ 하고, 그후 사기(史記)를 찬수할 적에 신이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썼습니다. 확실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사가독서(賜暇讀書)란 독서당에서 오로지 책과 소일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제도로 안식년 제도와 비슷하다. 그런데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내방객들 때문에 공부에 불편한 점이 많고, 절에서 하는 독서는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허다하므로 별도로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서거정의 주청이 받아들여서 성종은 1492(성종 23)에 남호 독서당(南湖 讀書堂)을 개설했다. 그 장소는 마포 한강 변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뒤쪽 언덕의 폐사(廢寺) 장의사(藏義寺)였고, 성종은 이 절을 수리하여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된 20칸의 독서당을 만들었다.

김일손은 14937월 예문관응교에 직을 두고 신용개, 강혼 등과 함께 독서당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남호 독서당은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쇄되었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인재양성과 문풍진작을 위해서 독서장려책을 적극 권장하였고, 1507년에 독서당제도를 부활하여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업원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는 주청이 끊이지 않음에 따라 중종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 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 독서당은 지금 성동구 옥수동 자리이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소각될 때까지 동호 독서당은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 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종은 김일손을 총애했다. 1490년에 성종은 세조 때 영의정을 한 최항(14091474)이 살던 집(지금의 이화장)을 사들여 요동 질정관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김일손에게 하사했다. 김일손이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자 모친과 함께 기거토록 한 것이다.

 

14938월에 성종은 자신이 지은 비해당((匪懈堂) 48영 차운시를 홍귀달, 채수, 유호인, 김일손에게 내려주고 이에 대한 답시를 지어 올리도록 했다. 그래서 김일손은 성종의 시 48영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발문도 지어 올렸다. (탁영선생연보에는 ‘14937월 예문관 응교에 직을 두고 사가독서를 하다. 8월 어제 48영에 화답하는 시를 짓고 발문을 지어 올리다.9월 독서당에서 추회부(秋懷賦)를 짓다. 10월 무풍정 이총이 내방하여 거문고 곡을 논하다라고 적혀 있다.( 탁영선생문집, p 693 )

 

(원래 비해당 48영시는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자신의 별장인 비해당의 풍물 48가지를 읊은 시이다. 1450년 가을에 안평대군은 ‘48영 시회를 열었는데 이 모임에는 당대 문사인 최항·신숙주·성삼문·이개·김수온·서거정·강희맹 등이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안평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으로 둘째 형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김일손은 성종이 내려주신 음식을 가지고 용산에서 배를 띄워 양화나루(楊花渡)에 이르러 무풍정(茂豊正) 이총(?1504)을 불렀다. 이총의 거문고 소리가 듣고 싶어서였다. 이총은 거문고를 안고 와서 후전곡(後殿曲)을 연주했다. 거문고 소리를 들은 김일손은 이총에게 무엇 때문에 이 곡을 좋아하느냐?’고 말하고 나중에 사초에 후전곡을 기록했다.

 

무풍정 이총은 태종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온령군 정의 손자이다. 김종직의 문하생이었고, 남효온의 사위였다. 그는 양화도 별장(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서 시와 거문고를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지낸 거문고의 달인(達人)이었다. 김일손도 독서당에서 특별한 거문고 탁영금(濯纓琴 보물 제957)을 연주했는데 가끔 이총으로부터 거문고 연주 지도를 받곤 했다.

 

한편 연산군의 친국이 끝난 후 빈청에서 유자광이 주도한 국문에서 이총은 공초하기를, “김일손이 독서당에서 사람을 시켜 신을 불렀으므로 신이 작은 배를 타고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가서 만났으나, 김일손이 기록한 곡조 및 같이 온 사람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였다.(14987127번째 기사)

 

이총은 김일손을 만난 적은 있으나 후전곡을 연주한 것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어서 연산군은 윤필상 등에게 명하여 김일손을 빈청(賓廳)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빈청에서 유자광은 사초(史草)를 가지고 김일손에게 축조(逐條 : 한 조목, 한 조목씩)하여 심문하니 김일손이 진술하였다.

 

"신의 사초(史草)에 기록한 바 황보(皇甫()이 죽었다.’ 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소릉(昭陵)의 재궁(梓宮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었고, 이개(李塏최숙손(崔叔孫)이 서로 이야기한 일과 박팽년(朴彭年) 등의 일과 김담(金淡)이 하위지(河緯地)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과, 이윤인(李尹仁)이 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과,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은 모두 고 진사(進士)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14987125번째 기사)

 

그러면 김일손의 사초에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황보(皇甫()이 죽었다는 것은 황보인과 김종서가 죽었다는 것인데 이는 14531010일 수양대군(나중의 세조)이 일으킨 성공한 쿠데타계유정난과 관련이 있다. 수양대군은 1010일에 김종서(1383~ 1453)의 집을 찾아가 철퇴로 김종서를 쓰러뜨렸다. 북방육진 개척에 공을 세운 대호(大虎) 김종서를 기습공격으로 무너뜨린 수양대군은 곧바로 왕명을 빙자하여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을 궁궐로 불렀다. 그리고 미리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김종서가 황보인 · 정분등과 모의하여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영의정 황보인 등을 죽였다. 이 날의 쿠데타가 바로 계유정난이다. (14531010일 단종실록에 자세히 실려 있고, 2013년에 개봉된 영화 관상은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인 계유정난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김일손은 사초에 세조와 관련한 여러 사항을 기록함으로써 세조 집권의 문제점을 적시하고 있다. 사학자 신병주도 세조의 집권은 유교 정치이념으로 볼 때 명분과 정통성, 도덕성에 하자가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적었다.(신병주 지음,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p 67)

 

그런데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를 범한 역적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김일손이 절개로서 죽은 인물로 사초에 적었으니, 유자광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