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2회 의금부 관원들, 김일손을 잡으러 경상도로 달려가다. 3회 연산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들여오라 명하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2회 의금부 관원들, 김일손을 잡으러 경상도로 달려가다.
기자명 푸드n라이프 입력 2024.03.21 13:44 댓글 0
1498년 7월 1일자 『연산군일기』의 뒷부분을 읽어보자.
“이윽고 의금부 경력(義禁府 經歷) 홍사호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들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외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했다.
의금부가 어떤 곳인가?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중죄인에 대한 옥사를 처리하는 특별사법관청이다. 의금부 구성을 보면, 당상관은 4인으로 판사(判事, 종1품)·지사(정2품)·동지사(同知事, 종2품)를 두었으나 모두 겸임하게 하였다. 당하관은 10인으로 경력(經歷, 종4품)과 도사(종5품)를 두었다. 의금부 경력(經歷, 종4품)과 도사(종5품)가 2명이 경상도로 달려간 것은 큰 옥사를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일은 외부 사람들에게는 극비로 진행되었다.”
홍사호와 신극성이 경상도로 달려간 지 열흘이 지난 7월 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였다. 실록청 당상 이극돈·유순·윤효손·안침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즉시 빠짐없이 대내로 들이라.” 하였다.(후략)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1일)
7월 11일의 연산군일기와 7월1일의 연산군일기를 연관시켜보면, 7월1일에 유자광 등이 연산군에게 아뢴 비사(秘事)가 바로 ‘김일손의 사초’였고, 그 사초는 『성종실록』 편찬과 관련된 일이었다.
따라서 의금부 관원 홍사호와 신극성이 경상도로 달려간 것은 김일손을 압송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김일손은 1496년(연산군 4년) 윤3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상도 청도군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질(風疾)이 있어 함양군 청계정사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면 연산군이 잡아오라고 한 김일손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경상도 청도군에서 살았는데 17세인 1480년에 밀양에 가서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1486년 9월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1월에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고 12월에 정자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487년 10월에는 노모 봉양을 위해 진주목학의 교수로 부임했다가, 1489년 11월에 요동 질정관으로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1490년 3월에 김일손은 승정원 주서 겸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연에 입시하여 노산군(단종)의 입후(立後 : 양자를 세우는 것)을 주청하였고, 사관에 입직하여 사초를 닦으면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했으며, 4월에는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하여 교정 · 감수하였다.
1490년 8월에 그는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9월에는 남효온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中興寺)에서 김시습을 만나 함께 백운대에 등정하고 5일간 같이 지냈다. 11월에는 진하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는데 1491년 2월 연경에서 예부원외랑 정유를 만나 『소학집설』을 얻었는데, 3월 중국에서 귀국하여 복명하고 소학집설을 인쇄하여 출간했다. 1491년 8월에 김일손은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는데 10월에는 충청도사에 보임되어 직언을 구하는 왕의 교지에 따라 소릉(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의 묘)의 복위를 주청하는 소를 올렸다. 1492년에는 홍문관 부교리에 직을 두고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1493년 1월에는 홍문관 교리로 승진했으며, 7월에는 예문과 응교로 직을 두고 사가독서 했다. 1494년 9월에는 이조정랑 겸 춘추관 시독관에 제수되었는데 12월24일에 성종이 승하하였다.
연산군이 임금이 되자 김일손은 1495년 2월에 신병으로 사직을 주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충청도 도사로 근무하였다. 김일손은 5월28일에 시국에 관한 병폐 26개 조목을 상소하였다. 여기에는 언로 확충, 사관 확대, 소릉 복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연산군은 어떤 비답(批答)도 내리지 않았다.
1495년 10월에 김일손은 사간원 헌납(정5품)에 제수되어 수륙제 금지와 소릉 복위를 주청하였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호노가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을 말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에 성행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유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수륙재는 관행처럼 이루어져 왔는데 연산군도 수륙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려 하자 1495년 11월에 헌납 김일손은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 · 정언 이주 등과 함께 수륙재를 반대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헌납 김일손은 대사간 김극유, 사간 이의무, 정언 한훈· 이주와 함께 소릉의 복위를 헌의(獻議)하였다. 이는 사간원 직원 모두가 헌의한 것이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2월 30일 묘제에 대하여 김극뉴 등 간원이 헌의하다)
그런데 김일손은 1496년 2월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서를 내고 고향인 경상도 청도로 내려갔는데 윤3월 29일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상복을 입었다. 1498년 6월에 김일손은 상복을 벗고 함양에 가서 정여창을 만났다. 그런데 풍병이 생겨 함양 청계정사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7월 5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당했다. (탁영선생연보, 지은이 김일손 옮긴이 김학곤 · 조동영, 탁영선생문집, 탁영선생숭모사업회, 2012, p 687-700)
# 한편 1498년 7월1일에 유자광 등이 연산군에게 아뢴 것은 『성종실록』 편찬 관련 김일손의 사초(史草) 내용이었다.
1494년 12월 24일에 호학군주 성종(1457∼1494)이 3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4개월 후인 1495년 4월 19일에 연산군은 어세겸 · 이극돈 등에게 『성종실록』 편찬을 명했다. 곧바로 춘추관 내에 실록 편찬을 위해 임시 관청인 ‘실록청’이 설치되었다.
실록청 관원은 영관사 신승선, 감관사 어세겸과 성준, 지관사 이극돈 · 박건 · 유순 · 홍귀달 · 노공필 · 윤효손, 동지관사 조익정 · 안침 등 9명, 편수관(編修官) 표연말 · 윤희손 등 27명등이었다. (연산군일기 1499년 2월 22일 참조)
그런데 실록청 당상 이극돈(李克墩 435∼1503)은 사초를 열람하면서 자신의 비행이 사관 김일손에 의해 기록된 사실을 알았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廣州 李氏)로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아들로서 이극돈의 형제는 5형제인데 모두가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이었다. 이극배는 영의정을 지냈고, 이극감은 형조판서, 이극증은 판중추부사, 이극돈은 좌찬성, 이극균은 좌의정을 지냈다. 갑자사화에 희생된 판서 이세좌도 이극감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이극돈의 비행은 세조 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상(喪)을 당했는데, 이극돈은 장흥의 관기(官妓)와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사실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세조 때의 궁금비사(宮禁秘事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궁궐의 비밀스런 일)를 유자광에게 알렸다. 소위 사초를 유출한 것이다.
이는 1498년 7월 29일자 『연산군일기』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사화의 전말)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를 읽어보자.
“급기야 사국(史局 : 실록청)을 열어 이극돈이 실록청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니 자기의 악한 것을 매우 자상히 썼고 또 세조조의 일을 썼으므로, 이로 인하여 자기 원망을 갚으려고 하였다.
하루는 사람을 물리치고 총제관(摠制官) 어세겸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이 선왕(세조를 말함)을 무훼(誣毁 무고하고 헐뜯음)하였는데, 신하가 이러한 일을 보고 상께 주달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는 그 사초를 봉하여 아뢰어서 상의 처분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후환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니, 어세겸이 깜짝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오래 있다가 유자광에게 상의하니, 유자광은 팔을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즉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을 가서 보고 먼저 세조께 은혜를 받았으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여, 그 마음을 감동 시킨 뒤에 그 일을 말하였으니, 대개 노사신·윤필상은 세조의 총신(寵臣)이요, 한치형은 궁액(宮掖 대궐 안에 있는 하인)과 연줄이 닿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따를 것으로 요량하여 말한 것인데, 과연 세 사람이 모두 따랐다. 그래서 차비문(差備門 창덕궁 희정당의 협문) 안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내어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이어서 아뢴 것이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3회 연산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들여오라 명하다 입력 2024.04.25 18:09 댓글 0
1498년 7월 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곳)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실록청 당상(實錄廳 堂上) 이극돈·유순·윤효손·안침이 함께 아뢰기를, "옛날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1일)
사초(史草)란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들이 왕의 언행 하나하나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다. 시정기는 임금의 일상부터 신하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 인물에 대한 비평도 들어있는 실록의 원천자료이다.
그런데 임금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자신들 악행이 실록에 그대로 실려 후세에 전해지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러함에도 조선 시대 초기에는 사초를 빌미삼아 탄압을 가한 적은 없었고, 심지어 선대왕의 실록도 보지 못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 임금도 『태종실록』을 보려했으나 편찬에 참여한 황희 등 신하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종
실록 1438년 3월2일)
그런데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들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러자 실록청 당상관들은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직필(直筆)! 이는 사실(史實)을 바르게 쓰는 일인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올바르게 기록하는 것이 사관의 길이었다. 사실을 왜곡하면서 권력에 아부하는 곡필(曲筆)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다.
직필은 달리 말하면 춘추필법(春秋筆法)이기도 하다. 공자(BC 551∼479)는 『춘추(春秋)』라는 노나라의 역사책을 저술하면서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즉 춘추필법은 직필의 대명사였다.
(『춘추』에는 노나라의 은공 원년(BC 722년)부터 애공 14년 (BC 481년)에 이르는 역사가 실려 있다. 맹자(BC 371 경∼289 경)는 공자가 『춘추』를 지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 사설(邪說)과 폭행이 일어났다. 신하로서 자신의 군주를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겼다. 공자께서 이런 세태를 두려워하여 춘추라는 역사서를 지었다. 춘추는 천자의 일을 다룬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일은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고, 나를 비난 하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맹자』 ‘등문공 하’ )
그러나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빠짐없이 대내로 들이라."고 재촉했다. 임금이 김일손의 사초를 보겠다는데 감히 말대꾸이냐는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에 이극돈 등이 다시 연산군에게 아뢴다.
"여러 사관(史官)들이 드린 사초를 신 등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김일손의 초한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신 등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벼슬한 이후의 조종조(祖宗朝)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김일손의 사초가 과연 조종조의 일에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것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신 등은 무슨 일을 상고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일이 만일 종묘사직에 관계가 있으면 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 등이 그 상고할 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고열(考閱)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義)에도 합당합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1일)
김일손의 사초 전체를 안 올리고, 왕실의 능멸에 관한 부분만을 절취해서 올리겠다는 이극돈의 입장은 그의 비행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묘책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가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이극돈 등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6조목을 절취하여 봉해 올렸다.
이어서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그 종실(宗室) 등에 관해서 쓴 것도 또한 들이라.” 하였다. 종실들의 비사(秘事)가 김일손의 사초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김일손의 사초(史草) 6 조목을 읽은 연산군은 분노했다. 세조(연산군의 증조부)의 궁금비사(宮禁秘事)등을 사초에 적다니. 이것이 능상(凌上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아 업신여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연산군은 김일손을 빨리 문초하고자 조바심이 났다. 7월 12일에 연산군은 "별감(別監) 세 사람에게 상등(上等)급의 말을 주어서 세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별감은 기다리다가, 잡아오는 김일손이 보이거든 차례차례로 달려와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1번째 기사)
이때 김일손은 경상도 함양군 청계정사에서 의금부 경력 홍사호와 도사 신극성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김일손은 1496년 윤3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상도 청도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병을 앓아 함양에서 요양 중이었다.
김일손은 잡혀오면서 사초 때문임을 직감했다. 그는 홍사호에게 처음 체포될 적에 “이는 필시 『성종실록』에 대한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사호등이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고 묻자, 김일손은 “나의 사초(史草)에, 이극돈이 세조 조에 불경(佛經)을 잘 외운 것으로 벼슬을 얻어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상(喪)을 당하여 장흥(長興)의 관기(官妓) 등을 가까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듣건대, 이극돈이 이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오히려 감히 못했다고 한다. 『실록』이 빨리 편찬되지 못하는 것도 필시 내가 임금에 관계되는 일을 많이 기록해서라고 핑계대고 비어(飛語)를 날조하여 연산군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7월12일 4번째 기사)
그랬다.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수록되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3번째 기사 김일손의 집에서 찾아낸 이목의 편지)
그런데 김일손과 이극돈의 악연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첫번째 악연은 23세의 김일손이 과거시험을 볼 때 있었다. 1486년(성종 17년) 병오년에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출제와 채점을 담당하는 시관(試官)이 예조 소속의 윤필상·이극돈·유지 등이었다. 이때 이극돈은 좌중에서 김일손에게 1등을 주자고 했으나 2등을 고집하여 김일손의 원망을 받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이극돈의 사초의 일에 대한 상소)
한편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에는 ‘김일손의 과거 응시’ 글이 실려 있다.
탁영(김일손의 호)이 별시에 응시하였을 때 탁영의 두 형 준손(駿孫)과 기손(驥孫)도 탁영의 손을 빌린 덕택에 탁영과 함께 모두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를 치르는 날, 탁영은 두 형의 책문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형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훗날 과거에 장원하려고 한 것이었다. 두 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준손은 갑과 제1인이었다. 훗날 과거를 치를 때 전시의 시관(試官 곧 이극돈)이 속으로 탁영의 문장인줄 알고서 그 사람됨을 꺼려 2인으로 밀어 두었기에 민첩(閔怗)이 제1인이 되었다. 김일손이 듣고서 성을 내며, “민첩이 어떤 사람이냐?”하였다.
두 번째 악연은 이극돈이 이조판서일 때 이조낭청을 뽑을 적에 생겼다. 이조낭청은 이조좌랑과 정랑자리를 말하는 데 인사권을 장악한 막강한 자리다. 전임 낭청들이 김일손을 모두 추천하여 이조낭청을 삼자고 했는데, 이극돈은 장차 홍문관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핑계대고 망(望 3배수 후보자)에 넣어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김일손이 이조낭청으로 추천되었는데도 이극돈은 불가하다 했고, 병조당상이 강력히 김일손을 추천한 후에야 김일손은 비로소 병조좌랑을 얻었으니, 이것이 김일손이 제2의 원망을 맺은 곳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세 번째 악연은 김일손이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였다. 김일손은 강직하여 권세 있는 사람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했는데 한번은 “이극돈과 성준이 서로 질투하고 모함하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당나라의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처럼 당(黨)을 만들 것이다.” 라고 상소했다. 이에 이극돈은 크게 노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29일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사화의 전말)
여기에서 우승유와 이덕유의 당쟁 (우이당쟁)은 823년부터 40년간 계속된 당나라 관료 집단의 당쟁이다. 우승유 당과 이덕유 당은 파면과 불임용을 거듭하고, 극심하게 대립하며 권력을 주고받았다. 우이는 당나라 목종(穆宗, 재위 820~824)때 붕당이 형성되어 이후 무려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우이당쟁은 단순히 권력 쟁취를 위한 관료 집단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피해는 백성이 오로지 입었다.
그리고 네 번째 악연이 바로 김일손의 사초이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원망하면서 사초의 기록을 지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김일손이 서울로 압송당하면서 의금부 관원 홍사호에게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극돈의 아들 이세전이 이웃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왔는데, 맏형에게는 문안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오지 않으면서 「이 사람이 병을 얻었다는데 아직 죽지 않았소.」 하였다 하니, 이극돈이 나를 원망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연산군일기 7월12일 4번째 기사)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