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1) 8.15 해방 (2) 건준 조직

김세곤 2024. 12. 17. 18:29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1) 8.15 해방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

 

- 연재를 시작하면서 -

 

1945815일에 조선이 해방되었다. 3년 후인 19488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9일에는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남북은 분단되었다. 해방정국 3(1945-1948)30회 연재 예정으로 자세히 살펴본다. -

 

1945815일 정오에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선언했다.

 

716일에 미국은 뉴멕시코 사막에서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그런데 일본은 19455월 독일의 항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양 전쟁을 이어갔다. 726일에 미국의 투르먼,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194586일 오전 815분 미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에 나타나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꼬마(리틀보이)’라는 별명의 원자폭탄은 1,500미터 상공에서 섬광을 발하고 낙하해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시가지는 파괴되었고 20만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88일에 소련이 재빨리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9일 새벽에 만주로 전격 진격했다. 소련은 1945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지만 계속 미루었다. 그런데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승리를 확신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극동 장악에 나선 것이다.

 

89일에 미군은 나가사키에 뚱보(팻맨)’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이날 원폭으로 7만여 명이 사망했다. 한편 일본은 도쿄에도 원폭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89일 한밤중, 도쿄의 작은 방공호 안에서 천황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최고위급 회의가 열렸다. 스즈키 수상은 내각 간사장에게 포츠담

선언을 낭독하도록 지시한 후, 토고 외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토고는 지체 없이 선언을 수락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군부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11명의 참석자들이 각자 의견을 개진했다.

 

다음날인 10일 새벽 2, 히로히토 천황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모든 해안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의심스럽소. 연합군의 선언을 수락하자는 제안을 재가하오.”

 

810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할 뜻을 밝혀오자, 미국 정부의 실무진은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을 38도 선으로 하였다. 38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SWNCC) 위원장인 국무 차관보 제임스 던은 8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Bonesteel)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승인을 받은 후, '일반 명령 제1'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일본군 항복안은 만주와 30도선 이북의 조선,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 극동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하고, 38도선 이남의 조선과 류큐 열도 및 필리핀에 있는 일본군은 미국 태평양육군 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편 8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히로히토 천황의 녹음된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옥음 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 또 내용도 알아듣기 매우 힘든 고문어체여서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방송국 직원이 구어체로 재차 방송하여, 국민들은 항복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날 조선은 해방되었다. 함석헌 옹의 말처럼 해방은 도둑처럼뜻밖에 찾아왔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한 것이다.

 

( 참고문헌 )

 

o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비, 1999

o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1, 인물과 사상사, 2004

o 김동춘 저, 대한민국은 왜? 1945-2005, 사계절, 2015

o 서중석 지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2) 건국준비위원회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

 

1945816일 오후 1시 계동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위원장 여운형이 5천여 군중 앞에서 20여분 간 연설하였다.

 

817일의 매일신보기사를 읽어보자.

 

조선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 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 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써 피를 흘린다는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승낙하였다.

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8,9,10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명도해 달라. 3)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대해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분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각국은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 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기협 지음, 해방일기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너머북스, 2011, p 81-82)

 

그러면 여운형의 건준이 조선의 치안과 행정을 도맡게 된 경위를 살펴 보자. 1945811일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 귀국과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18901945)에게 치안과 행정을 맡아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중경 임시정부만이 통치 권력 이양 권한을 갖고 있다면서 요청을 거부하였다. 14일에 총독부는 송진우와 가까운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18861947)을 접촉하였다. 814일에 여운형은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로부터 15일 아침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의 필동 관저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운형은 815일 오전 8시 엔도와 만나 일본 측이 요구한 자주적 치안 유지와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고, 5가지 조건을 받아 내어 협상을 타결하였다.

 

이어서 여운형은 우익 지도자 송진우를 직접 찾아가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송진우는 경거망동을 삼가라. 중경 정부를 지지하여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여운형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직접 싸워 온 거대한 세력은 국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 있는 3천만 민중이라면서, 임정은 해외에 30년간 머물면서 이렇다 할 업적이 없고 국내에 인민적 토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로 군림할 수 없으며, 임정은 많은 해외독립 단체가 만든 정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815일 밤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 유지 및 행정권을 인수한 여운형은 조직 구성에 나섰다. 여운형은 19448월에 결성했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을 발족시켰다.

 

 

건준 위원장은 중도좌파인 여운형, 부위원장은 중도 우파인 안재홍이 맡았다. 건준이란 명칭은 안재홍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건준의 강령은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한다.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정권의 수립을 기한다.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한다 등이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 2004, p 3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