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김세곤의 역사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73)

김세곤 2024. 12. 2. 19:06

[김세곤의 역사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73)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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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12.02 12:48
  • 수정 2024.12.02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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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 발표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하지의 좌우합작 찬성 담화에 돈암장 긴장

6월 29일 이승만의 민족통일 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설치 발표가 있고 30일에는 하지 중장의 좌우 합작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중대 성명(重大聲明)이 있어 정계는 복잡 미묘히 움직이고 있는데 돈암장(敦岩莊)에는 7월 1일 아침 일찍부터 민의의원(民議議員) 출입도 있고 자못 긴장한 감이 돌고 있다. 이날 이 박사는 출입기자단에게 항간에는 여러 억측이 구구하나 김규식 박사 · 김구 씨 그리고 나와의 3인은 유기적 관련이 있으며 이신동체(異身同體)라는 것을 강조하였다.(서울신문 1946년 7월 2일)

# 김구, 동포에게 고하는 성명 발표

민주의원(民主議院) 총리 김구(金九)는 입국 이래 아무런 공식적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다만 침묵을 지켜오던 바 7월 4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다음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가 금후 적극적 태도로 나올 전제로 보여 금후가 주목되는 바이다.

「입국 이래에 모든 관점을 일관하여 한 번 소감을 발표코자 하였으나 종횡으로 오는 외래의 정세에 포니(抱泥)되고 상하(上下)로 다단한 국정(國情)에 비추어 자못 자중하고 침묵을 지키어 왔으나 점차로 국론은 옥석을 구분치 못하고 정국(政局)은 날로 암흑한 장막에 가리워 일발(一髮)을 난용(難用)할 위기에 직면하였다.

 

무엇보다도 애국자니 반역자니 좌니 우니 하는데 있어서 먼저 말하고자 한다. 과연 무엇을 가리켜 좌라 하고 우라 하며 또 누구를 가리켜 애국자라 하고 반역자라 하는가?

좌우 운운하는데 있어서는 연합군이 남북 할거하여 남북이 나누어졌고, 반탁과 찬탁의 기치가 엄연히 대립하여 양대 진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의 흉중에는 좌니 우니 하는 것은 개념조차 없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동포의 행복을 위하여 분투할 것이며 일보를 전진하여 우리 동포는 세계 인류와 같이 형이상하(形而上下)의 번영과 익이좌우(翼而左右)의 생존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할 뿐이다.

건국강령(建國綱領)의 요소에 있어서는 좌니 우니 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원칙으로 할 것이 이미 국제공약에서 약속된 것이다. 인류 5천 년 역사를 통하여 봉건적 악폐에 시달려 온 우리로서야 누가 또 다시 압박자와 착취자와의 집단체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동경하고 구가할 것이냐?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동포의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서는 3천만이 단결하여 일로 매진할 뿐이다. 좌니 우니 하는 것은 민족 자멸의 근원이 될지니 생각할수록 마음이 찢어질 듯하다. 중류(中流)의 풍파는 오월(吳越)도 합작하였거늘 하물며 사위(四圍)에 고립하여 독립을 절규하는 우리로서야 차마 동족 분열을 요연(要然) 자행 할배랴!

3천만 민중의 절대 희구는 오직 독립과 해방뿐이다. 어느 나라의 식민지나 어느 나라의 연방은 요(要)치 않는다. 나는 4천 년 역사의 존엄을 장(杖)하고 3천만 민중의 기대에 응하고 광복을 위하여 적에게 장의취사 (杖義就死)한 선열(先烈)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자주독립을 절대의 전제로 투쟁할 뿐이다.

 

리니지2M 5주년

 
 

리니지2M 5주년

 

애국자니 반역자니 하는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3천만 민중이 먼저 치밀한 분석과 엄격한 비판이 있을 줄로 믿는 바이다. 내가 일찍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만리이역(萬里異域)에서 풍진천석(風塵天石)을 무릅쓰고 동서에 구치(驅馳 몹시 바삐 돌아다님)하고 남북에 류락(流落)한 것이 어언 30여 년이오, 천령(賤令)이 칠십유일세(七十有一歲이)이다. 조모(朝暮)의 여생을 모르는 나로써 어찌 3천 만 대중의 희망을 저버리고 일생의 고절(孤節)을 버릴 배냐.

7월 1일 공산당 서기국에서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를 통하여 ‘분열책임자를 추방하라’는 제목 아래 나를 괴수라 하였으니 나는 이것을 볼 때 과연 나라에 우국지사와 혁명투사가 얼마나 있는가를 십분 생각하여 보았다.

적이 항복하던 전날까지 적의 진두에 서서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하고 적의 승리을 위하여 맹세하고 청년학도를 일으켜 전쟁터로 내몰고, 적의 주구가 되며 적(敵)의 기관에 암약하여 적을 위하고 동포를 고압(高壓)하던 자와 적이 항복하고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적의 통치기관인 총독부에 출입한 자는 모두 애국자이며 사상가이며 정치가인가?

 
 

나를 테러의 괴수라 하였으니 이것은 자신이 부정치 않는다. 금월 6일 우리 민족 전체가 경의를 다하여 봉장(奉葬)케 된 3열사에 윤봉길·이봉창 의사(義士)의 의거(義擧)에 있어서는 김구가 사주(使嗾)하였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표된 것이다.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서는 이 이상의 방법이라도 취하였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우리나라의 독립에 일분(一分)이라도 불리한 조건이 된다면 나는 오늘이라도 단(壇)에 나리어 동포 앞에 솔직히 사의를 표하려고 한다. 친애하는 동포여! 절역(絶域)에서 전전할 때에 고국(故國)의 산하를 바라보면서 그리운 동포를 연상할 때에 어찌 오늘과 같은 경우를 뜻하였으랴? 동포여 반성할지어다. 동포여! 단결할지어다.」(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

(참고문헌)

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한국현대사료DB, 자료 대한민국사 제2권 1946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