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4회 연산군, 김일손을 친국하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4회 연산군, 김일손을 친국하다.
기자명 푸드n라이프 입력 2024.05.09 12:45 댓글 0
1498년 7월 12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을 빨리 친국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는 전교하기를, "겸사복장(兼司僕將)에게 명해서 겸사복(兼司僕 국왕의 신변 보호와 왕궁 호위를 맡은 친위대) 등을 거느리고 건양문(建陽門) 밖으로 나가, 연영문(延英門)·빈청(賓廳) 등지를 에워싸고 파수를 보면서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건양문은 창덕궁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었던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이다. 지금의 검표소 근처이다. 연영문(延英門)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인데 현재는 없고, 주변이 소나무 뜰이다. 희정당 앞 카페가 빈청이다.)
“이윽고 의금부 낭청(郞廳) 홍사호가 김일손을 끌고 들어오자, 연산군은 의금부에 명하여 허반(許磐)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 때에 김일손은 호조정랑으로 모친상을 당했는데, 상복(喪服)을 벗자 풍병이 생겨 청도군(淸道郡)에서 살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1496년 2월에 사간원 헌납에서 호조좌랑으로 전보되었다.), 허반은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 承文院副正字)로 관청에 있었다.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관서로서, 부정자는 종9품이다. 승문원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상이 수문당(修文堂 희정당의 옛 이름) 앞문에 납시니,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신수근과 주서(注書) 이희순이 입시하였다.
(희정당 熙政堂은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지어진 건물인데 성종 때에는 숭문당(崇文堂 정사를 들을 뿐만 아니라 글을 닦는 의미) 또는 수문당(修文堂)이라 했다. (연산군일기 1496년 12월 8일). 그런데 1496년 6월에 수문당에 화재가 나서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정사에 빛을 비춘다는 의미)으로 고쳤다. 연산군일기 1496년 6월14일, 8월19일)
연산군은 김일손을 좌전(座前)으로 나오게 하고 친국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2번째 기사)
희정당 정문
희정당 정문
희정당 안내판
희정당 안내판
연산군은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 조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대로 말하라."고 전교하였다.
김일손은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연산군의 첫 친국은 『성종실록』 편찬과 관련한 연산군의 증조부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년)때의 일이었다. 김일손은 연산군이 ‘세조조’의 일이라고 물었는데도 알아차리고 세조와 덕종의 후궁인 권귀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뢰었다.
권귀인(종1품)은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1437∼1457)의 후궁이다. 의경세자는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1457년 9월 2일에 별세했다. 나이 20세였다.
그의 동생이던 예종(재위 1468∽1469)이 세조의 뒤를 이어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예종 역시 보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죽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13세에 임금이 되었다. 바로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이다. 성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였다.
그런데 김일손은 ‘세조가 며느리인 권귀인을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 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고 사초에 쓴 것이다. 이 일은 왕실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세조(시아버지)와 권귀인 (며느리)간의 궁금비사(宮禁秘事)였다.
연산군의 친국은 이어진다.
연산군 : "어떤 사람에게 들었느냐?"
김일손 : "전해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김일손은 사관에게 들은 곳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한다.
연산군 : "《실록》은 마땅히 직필(直筆)이라야 하는데, 어찌 망령되게 헛된 사실을 쓴단 말이냐. 들은 곳을 어서 바른 대로 말하라."
김일손 :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
김일손, 당당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사관의 길을 말하고 있다.
연산군 : "그 쓴 것도 반드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소문 역시 들은 곳이 꼭 있을 것이니, 어서 빨리 말하라.”
김일손 : "옛 역사에 ‘이에 앞서[先是]라는 말도 있고, 처음에[初]’라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또한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쓴 것이오면, 그 들은 곳은 바로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이옵니다." 하였다.
김일손은 버티고 버티다가 권귀인의 조카 허반으로부터 권귀인의 일을 들었다고 실토한다.
연산군 : "네가 출신(出身)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세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쓰려는 의도는 무엇이냐?“
세조와 권귀인의 일은 의경세자가 1457년 9월 2일에 별세 후 상을 치른 뒤에 일어난 일이다. 1458년에 일어난 일이니 김일손(1464∼1498)으로서는 6살에 일어난 일이다. 이랬으니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이 일을 사초에 쓴 의도를 물었던 것이다.
김일손 : "전해들은 일을 좌구명(左丘明)이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썼습니다."
좌구명은 공자가 편찬했다는 노나라의 역사 (BC 722-477) 『춘추(春秋)』를 상세하게 해설한 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저자이다.
좌구명은 풍부한 사료를 기반으로 하여 『춘추』의 배후에 있는 사실들을 상세히 기술하고 춘추와 관계없는 전해 들은 이야기도 많이 기술하였다. 그는 『춘추좌씨전』을 지으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정한 평가(춘추필법)과, 공자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은 미언(微言)과 미언의 행간에 감춰져 있는 공자의 기록 의도(大義)까지 해설했다.
즉 『춘추』의 간략한 사실에 추가하여 사건 전후의 배경, 야사까지도 상세히 적었다. 김일손은 이런 좌구명의 역사서술 방식을 본 따서 세조의 시대도 적었다고 진술했다.
희정당 앞뜰
희정당 앞뜰
옆에서 본 희정당
옆에서 본 희정당
연산군의 친국은 계속된다.
연산군 : "그 권씨의 일을 쓸 적에 반드시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말하라."
김일손 : "국가에서 사관(史官)을 설치한 것은 사(史)의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놓았으니, 신은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
연산군은 공모자를 대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김일손은 사관의 직무를 이야기하면서 혼자서 죽겠다고 진술한다.
이어서 연산군은 덕종(德宗)의 후궁 소훈윤씨(昭訓尹氏)에 대하여 국문한다.
연산군 : "네가 또 덕종의 소훈윤씨 사실을 썼다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들었느냐?"
김일손 : 이것 역시 허반에게서 들었습니다."
소훈 윤씨 역시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으로 종5품이었다. 그런데 권귀인이 세조의 부름을 받아 대내(大內 임금의 거처)에 들어갔을 적에 시종하던 계집종 신월(新月)이가 소훈 윤씨의 일을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덕종의 상을 마친 후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토지와 노비와 집 등을 하사했는데, 일반적으로 내리는 시혜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대소의 거둥에는 반드시 어가(御駕)를 수행하게 하였다는 소문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5일- 『실록』에 기록된 윤씨·권씨의 일에 관한 허반의 공초 내용)
이는 시아버지(세조)와 며느리(소훈 윤씨)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 이런 왕실의 비밀을 사초에 기록했으니 노한 것이다.
연산군 :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느 사람과 함께 들었느냐?"
김일손 : "들은 월일이나 장소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잡인(雜人)과 더불어 말했겠습니까. 신이 참으로 혼자 들었습니다."
연산군 : "허반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한때에 말했느냐?"
김일손 : "그러하옵니다.“
김일손은 권귀인과 소훈 윤씨의 일 두 가지를 허반으로부터 들었다고 아뢴다.
연산군 : "이러한 중대사를 어찌 잊을 리 있겠느냐. 네가 들은 곳이라든가 어느 날, 어느 달에 함께 들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두 말하라."
김일손 : "어느 날, 어느 달과 들은 곳에 대해서는 신이 실로 잊었습니다. 신이 이미 큰일을 말씀드렸사온데, 어찌 감히 이것만을 거짓말하오리까. 허반이 혹은 신의 집에서 자기도 했고 신도 또한 허반의 집에서 잤사온데, 함께 유숙할 때에 허반이 말하였으므로, 신이 실로 혼자서 들었습니다."
이러자 연산군은 허반을 잡아오라고 명한다. 이때 허반은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관청에 있었다.
허반이 잡혀오자 연산군은 허반을 좌전(座前)에 나오게 하고 친국했다.
연산군 :"네가 김일손과 더불어 말한 바가 있었는데, 모두 진술하라."
허반 : "신은 말한 바 없사옵니다."
허반은 김일손에게 말 한 바가 없다고 잡아뗀다.
연산군 : "너는 일손을 알지 못하느냐?“
허반의 진술이 이러자, 연산군은 허반에게 김일손을 알지 못하냐고 캐물었다.
허반 : "신이 신해년에 김해(金海)에 있는 종의 집에 갔을 적에, 김일손이 사건이 있어 김해에서 국문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신이 그 이름을 듣고 가서 보았는데, 드디어 상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같이 지내면서 글 읽은 일도 없으며, 깊이 서로 사귀었으나 또한 말한 일은 없습니다." (허반은 1491년 신해년에 김해에서 김일손을 처음 만났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김일손이 김해에서 국문을 당한 때는 기유년(1489년) 10월이다.(탁영선생 연보에 의함). 허반의 진술은 착오가 있다.)
허반은 전혀 말한 바 없다고 또 잡아뗀다.
연산군 : "네가 한 말은 김일손이 이미 다 말했는데, 네가 감히 속이느냐?"
연산군은 허반에게 감히 속이느냐고 언성을 높인다.
허반 : "그러한 사실이 있다면 어찌 감히 하늘을 속이리까. 청컨대 김일손과 더불어 대질하겠습니다."
허반은 김일손과 대질하겠노라고 버틴다.
연산군 : "네가 일손과 더불어 권귀인(權貴人)·윤소훈(尹昭訓)의 일을 말했다는데, 감히 끝내 휘(諱 거짓말)할 생각이냐?"
허반 : "신은 바로 귀인의 삼촌 조카이온데, 궁금(宮禁)의 일을 어찌 감히 말하오리까. 김일손이 신을 끌어댄 것은 계교가 궁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허반은 끝까지 버틴다. 이러자 연산군은 허반과 김일손을 대질 심문 시킨다.
연산군 : "허반이 끝내 거짓말하니, 네가 그와 면질(面質)하라."
김일손 : "신이 궁금(宮禁)과 연줄이 안 닿는데, 어디서 들었겠습니까. 신은 실지로 허반에게서 들었습니다."
허반 : "궁금의 일을 신이 어찌 감히 말하리까. 일손이 계교가 궁해서 그랬거나, 아니면 병이 깊고 혼미(昏迷)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김일손 : "신은 비록 혼암(昏暗)하고 미욱하오나 어찌 망언(妄言)까지 하오리까."
이러자 연산군은 허반이 속임을 알고 명하여 어전에서 형장 심문을 했다. 그러나 허반은 형장 30대를 맞고도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