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유럽여행단상(斷想)-독일 프랑크푸르트(6) 파울교회와 제1회 독일의회

김세곤 2024. 6. 22. 01:49

김세곤의 유럽여행단상(斷想)-독일 프랑크푸르트(6) 파울교회와 제1회 독일의회

 

3월 31일(일요일) 11시40분, 괴테하우스를 나와 뢰머광장으로 갔다. 고풍스런 골목길을 걷다 보니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파울교회가 나왔다. 교회 앞 벤치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제 슈퍼에서 산 빵과 소세지, 쥬스 등이다.

프랑크푸르트 지도
 
라츠켈러라고 써진 고풍스런 건물

이윽고 파울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교회 냄새가 안 난다. 대형 그림만 전시되어 있다.

파울교회
파울 교회 내부

교회를 잠깐 보고 나오면서 내부 벽면에 있는 표시판을 찍었다. 거기에는 “독일의 외국계 은행들이 독일 국민의회(the German National Assembly) 150주년을 기념하여 이 교회를 재건하였다. 1998년 5월”이라고 독일어와 영어로 적혀 있다.

교회 밖을 나오니 오른편 벽에 “개원 50주년 기념, 제1회 독일의회, 189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1848년에 독일 국민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단 말인가?

교회 재건 표시판 1998년 5월
파울교회 오른편 벽면

궁금하여 파울교회와 독일국민의회, 독일사를 검색하였다.

 

『두산백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848년 5월 18일, 독일 제1회 국민회의에서 그림 형제를 포함한 대의원들이 59개 항목의 국민 권리를 채택한 곳이 이곳이다. 지금은 교회로서의 기능보다 집회나 축하연 장소로 이용되지만, 여전히 자유, 통일, 민주주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심플한 교회 홀에서 독일 출판 평화상과 괴테 상의 시상식이 열린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독일을 자유주의적으로 통일하려는 시도였던 1848년 독일 혁명으로 설치된 입헌 기관으로서, 1848년 5월 18일부터 1849년 5월 31일까지 프랑크푸르트의 파울 교회에서 열렸다.

1848년 2월 프랑스 혁명을 촉매제로 독일에서도 3월 혁명이 일어나 통일 국가 형성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 시위와 집회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자 뷔르템베르크의 군주 빌헬름 1세는 검열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 개병제와 집회의 자유를 약속하였다.

혁명의 열기에 들뜬 남서부 독일 출신의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1848년 3월 5일에 하이델베르크에 모였다. 이들은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준비할 7인의 위원을 선출하였다. 다시 한번, 흑 · 적 · 금 3색의 깃발 아래 애국주의적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독일 연방의회는 1848년 3월 말과 4월 초 사이에 연방투표법을 결의하여 독일 주민들이 국민의회를 선출할 수 있도록 하였고, 독일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의회가 구성된다.

국민의회는 곧 건국될 통일 독일을 위해 미리 설치된 입법부로서 기능하였으며, 제국법률(Reichgesetz)을 마련하였다.

 

1848년 6월 28일에는 중앙권력법을 통해 통일 독일을 위해 미리 설치된 행정부로서 임시 중앙 권력을 설립하였다. 또한 혁명의 양대 과제였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실현을 위하여 통일 국가의 헌법 마련 작업을 하였다.

 

국민의회는 길고 격한 논쟁 끝에, 의회 민주주의의 원칙에 기초하여 작성된 프랑크푸르트 헌법을 1849년 3월 28일 가결했다.

그런데 헌법은 대부분의 개별 독일 국가들과 프로이센의 양원에서 승인되었으나, 프로이센 왕은 거부했으며 바이에른, 하노버, 오스트리아 같은 거대한 개별국가들 역시 헌법을 승인하지 않았다.

더구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그에게 추대된 독일 황제의 자리를 거부하면서 국민의회는 최종적으로 좌절되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국민의회의 자국 대표에게 의석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으며, 혁명을 노골적인 폭력으로 짓밟았다.

혁명의 실패는 독일 자유주의의 패배를 의미했다. 그러나 헌법의 본질적 부분은 20세기에 이어져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과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의 밑바탕이 되었다.

좋아요8슬퍼요0화나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