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교토의 코무덤 (3)

김세곤 2024. 4. 12. 15:05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교토의 코무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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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4.0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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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 /호남역사연구원장

1600년 10월 2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동군 10만 명은 세키가하라 벌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家臣) 이시다 미쓰나리(1560-1600)의 서군 8만 명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패권을 잡았다.

히데요리와 모친 네네 자결 터

이 전투로 동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승승장구했고, 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형에 처해졌다.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고, 관동의 에도(도쿄)에 막부를 세웠다. 이어서 에도 막부는 1615년 여름 오사카성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1593-1615) 군대를 섬멸하였다. 참패한 히데요리는 모친 네네와 함께 자결하였고 히데요시 가문은 문을 닫았다.

그러면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 입장은 분명하지 않다. 적극적으로 히데요시 흔적 지우기에 나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찬양하지도 않았다.

1700년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 역사소설 『에혼 다이코기(회본태합기 繪本太閤記)』가 인기를 끌었다. 1719년에는 히데요시를 주연으로 하는 가부키가 오사카에서 공연되었는데 대성황이었다. 백성들은 히데요시에 열광하였다. 이럼에도 에도 막부는 수수방관하였다.

교토의 코무덤에 대하여도 그렇다. 에도막부는 코 무덤을 은근히 활용하였다. 조선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하였을 때 도용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대불사를 방문 코스로 넣고, 그 옆에 있는 코 무덤을 자연스럽게 보도록 한 것이다.

한편 에도막부는 임진왜란 7년 전쟁(1592-1598)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조선과의 교린을 추진하였다. 1599년부터 대마도주는 일본에 끌고 간 조선 포로들을 수시로 송환하면서 교섭을 간청하였다. 1
604년에 조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중을 살피기 위하여 승려 사명당 유정을 탐적사(探賊使 적의 행동을 살피는 사신)란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했다.

1605년 3월에 유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이때 이에야스는 자신은 임진왜란에 참가하지 않았음을 강변하였다. 이에 유정은 에도 막부의 뜻을 확인하고 포로 1,39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606년 6월에 조선은 두 가지 조건을 일본에 제시하였다. 즉 일본 국왕 명의의 강화요청서를 보낼 것, 임진왜란 당시 왕릉 도굴범을 붙잡아 보낼 것이었다. 11월 8일에 일본은 일본 국왕 인이 찍힌 문서와 도굴범 두 사람을 범인으로 조선에 보냈다.
물론 조선 조정은 국서는 위조이고, 도굴범도 잡범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조선의 요구가 형식적으로는 수용되었기 때문에 1607(선조 40)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은 1811(순조 11)년까지 12차례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의 초기 3회(1607년, 1617년, 1624년)의 일본사절은 ‘회답겸쇄환사 (回答兼刷還使)’라 했다. 회답이란 외교적 사항에 대한 답례라는 뜻이고, 쇄환이란 ‘빗자루로 쓸 듯이 모두 데려온다.’는 뜻이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전후 처리와 일본에 끌려간 10만 명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을 ‘빗자루로 쓸듯이 모두 본국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신뢰가 통한다.’는 의미의 통신사(通信使)는 1636년 4회 사신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 사신이 코 무덤을 본 것은 1617년 2차 사행 때부터이다. 1617년에 조선 정부는 포로 쇄환과 에도막부의 오사카 평정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정사는 오윤겸, 부사는 박재, 종사관은 이경직이었고 일행은 428명이었다.

8월 26일에 후시미성에서는 히데타다 쇼군에 대한 국서 봉정식이 거행되었고 연회가 벌어졌다. 히데타다 막부는 후시미성의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하급 관리와 하인들에게 대불사(大佛寺)에서 음식을 접대하였다.

조선 사신들은 대불사 연회에 참석하고 근처의 코 무덤을 보았다.

이경직의 『부상록(扶桑錄)』 8월 26일 일기를 읽어보자.
“대불사 절 앞에 높은 구릉이 있어 무덤 모양 같았고, 석탑(石塔)을 설치했는데 수길(히데요시)이 우리나라 사람의 귀와 코를 모아다가 여기에 묻은 것이다. 수길이 죽은 후에 수뢰(히데요리)가 봉분을 만들고 비(碑)를 세웠다 하는데, 이 말을 들으니 뼈에 사무치는 통분을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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