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 27회 진주성 순절

김세곤 2024. 2. 15. 20:40

임진왜란과 이순신 그리고 나대용- 27회 진주성 순절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93621일부터 629일까지 9일간의 제2차 진주성 싸움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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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선봉대 기병 200명이 척후활동을 시작했다. 척후병은 마현 봉우리 위에서 활동하더니, 조금 뒤에 10여만 명의 왜군이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그런데 왜군은 탄알 한 발 쏘지 않고 위세를 보인 뒤에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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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첫 공격이 시작됐다. 아침 10시부터 왜군 10만 명이 일제히 밀려왔다. 개경원 산 중턱에 진을 친 가토가 이끄는 1진과 향교 앞길에 있던 고니시의 2진이 동시에 쳐들어왔다. 첫 교전은 아군의 승리였다. 아군은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왜군들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돼서야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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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도 왜군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낮에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싸워 4번 물리쳤다.

 

이 날 고성 의병장 최강과 이달의 군사 300여명이 진주를 구원하려고 달려왔다가 적의 세력에 놀라서 다시 고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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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증원군 56천 명이 와서 마현에 진을 치고 또 5600명이 더 와서 동편에 진을 치고 아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성 안팎에 죽은 자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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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서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순성장 황진도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직접 옷과 전립을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남녀들도 힘을 다해 축조를 도와 하룻밤 사이에 완성됐다.

 

이에 현자총통을 쏘아서 적의 소굴을 부쉈으나 적이 곧 다시 만들었다. 이 날도 3번 싸워 3번 물리치고, 밤에 또 4번 접전해 4번 다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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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군사들이 큰 나무 궤짝 위에 짐승 가죽을 입힌 뒤 그것을 방패삼아 성벽 밑으로 육박해 성을 헐려고 했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 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 내려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을 만든 뒤 성안으로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 불화살이 성안의 초가에 떨어져 화염이 자욱했다. 황진도 마주 보고 나무를 세우고 판자 집을 만든 뒤 대포를 쏘아 왜군의 판옥을 무너뜨렸다. 성안 사람들이 물을 길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이 날 거제현령 김준민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다가 죽었다. 아군 장수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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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1주일 되는 날이었다.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흙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 대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그 위에서 총탄을 발사했다. 성안의 군사 300여명이 전사했다. 또 왜군은 귀갑차를 이용해 성 밑으로 접근해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차를 태우자 왜군이 퇴각했다.

 

왜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김천일은 장윤을 임시로 목사에 임명해 사태를 진정시켰다.

 

왜군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글은 온 백성이 성안에서 일시에 모조리 죽음 당하는 것은 처참한 일이 아닌가. 항복하면 생명은 보장해 주마라는 내용이었다. 김천일은 곧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 30만명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해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답장을 보고 왜군은 옷을 걷고 볼기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명군은 이미 다 물러갔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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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이 지나자 왜군은 더욱 공세 수위를 높였다. 왜적이 북문을 침범해 성문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곳은 진주목사 서예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성을 뚫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성이 무너지려 했다. 적이 바야흐로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김해부사 이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왜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해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다시 물리쳤다.

 

황진이 순찰차 이곳에 이르렀다가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고 했다. 이 때 왜군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쐈는데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황진은 용맹과 지략이 으뜸이어서 그를 믿고 의지했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사기가 저하됐다. 이 날 황진의 죽음을 조문하는 듯 장맛비가 음산하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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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순국의 날이었다. 황진이 죽자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다.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혼이 빠져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 최경회가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해 서예원을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순성장을 맡겼다. 장윤은 명망이 황진 다음 가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윤마저 분전 중에 탄환에 맞아 죽었다.

 

오후 1~3시경에 왜군이 동문 성벽의 기초 석 몇 개를 뽑아내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왜적의 무리가 개미떼처럼 기어올랐고 이어서 서문과 북문도 뚫렸다. 창의사 김천일 부대가 사력을 다했지만 버텨내지 못했다. 드디어 왜적은 성에 올라와 병기를 휘두르니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촉석루로 들어갔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김천일을 부축해 피하기를 권했다. 그러나 김천일은 꿋꿋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서 죽겠다하고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고종후·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한편 이종인, 이잠, 강희열등 10여명은 장검을 뽑아 들고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이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했다. 목사 서예원 및 판관 성여해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며, 여러 장령(將領)들도 다 죽었다. 성안의 백성들도 앞을 다퉈 남강에 투신해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7만 명이나 됐고, 성이 온통 폐허가 됐다.

 

9일간의 진주성 혈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명나라와 관군이 버린 진주성을 호남의병과 몇 지역의 경상도 관군이 사수했지만 버틸 수 없었다. 병력만도 무려 101이었으니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전투였다. 이 싸움은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던 버마재미 한 마리가 수레바퀴를 밀어내려 한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진 1 진주성계사순의

 

사진 2 진주성 위치도

 

사진 3 창렬사 입구

 

며칠 후 왜군은 촉석루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이때 최경회의 소실 논개는 기생으로 변복해 왜장의 흥을 맞추다가 의암 바위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었다.

 

사진 4 남강

 

사진 5 의기사

 

사진 6 정약용 글

 

사진 7 매천 황현의 시

 

사진 8 진주성 계사순의단의 논개 부조

 

 

왜군은 비록 진주성 전투에서 이겼지만 당초 목적인 호남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왜군은 진주성 전투의 피로가 겹쳐서 하동, 구례, 순천 등지를 잠시 분탕질하고 경상도로 돌아왔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진주성에서 대패한 이유를 상당부분 김천일 탓으로 돌렸다.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가 한양 백성들중에서 모집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김천일 자신도 전쟁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하는 인물이었다. 또 그는 평소부터 서예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의견이 어긋나기 일쑤여서 명령이 통일될 수도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대패한 것이었다.” (유성룡 · 김민수 엮음, 징비록, 돋을새김, 2009, p 183)

 

동인인 류성룡은 서인인 김천일을 비난한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 유격 오종도는 글을 지어 김천일을 추모했고, 159361일의 선조수정실록’(서인이 주도한 선조실록의 수정)에는 김천일을 칭송하고 있다.

 

적이 10배의 병력으로 계속 들이닥쳤으니 이는 김시민이 당하던 적과는 중과(衆寡)가 현저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김천일 등은 충의만을 가지고 군사와 백성을 격려했던 것인데 황진·이종인·장윤·김준민 등이 왜적을 살상하면서 9일이 지나서야 힘이 다했으니, 전투 방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때 김천일 등이 아니었더라면 겁 많고 미련한 서예원으로서는 필시 하루 이틀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예원의 형 서인원이 김천일을 교묘하게 비방하면서 서예원을 신원하려고 했던 까닭에 사대부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있게 됐고, 심지어는 선조 앞에서 김천일의 뜻은 숭상할 만하나, 재주가 졸렬해 일을 그르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천일이 국사를 그르친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주시 동신대학교 뒤에는 정렬사(旌烈祠)가 있다. 이곳에는 창의사

김천일과 큰아들 김상건 그리고 참모 양산숙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사진 9 정렬사

 

사진 10 정렬사 창의문

 

사진 11 묘소 입구의 김천일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