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김세곤의 근현대사기행]대구근대골목투어(5)-박정희와 육영수, 대구에서 결혼하다.

김세곤 2024. 1. 19. 03:37

[김세곤의 근현대사기행]대구근대골목투어(5)-박정희와 육영수, 대구에서 결혼하다.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4.01.18 21:18
  •  댓글 0
 
 

육영수와 결혼하기로 한 박정희는 조강지처 김호남과 이혼이 정리 안 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박정희는 조카 박재석(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에게 또 다시 독촉했다. 박재석은 그전에도 김호남의 친정에 가서 사정을 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박재석은 이번에는 결판을 내야겠다고 결심하고 경북 선산군 도개면에 있는 박정희의 장인 김세호를 찾아갔다.

박재석은 큰 절을 올린 뒤 말을 꺼냈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혼 도장을 찍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김세호가 거절하자 박재석은 야무지게 나왔다. 

“법적으로도 가출하여 1년이 지나면 이혼이 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도장을 안 찍어주시면 김씨 집안에 대한 소문이 나쁘게 날 것입니다. 따님이 이미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던데요.”  

김세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쌈지를 열고는 나무 도장을 꺼내 박재석에게 던져 주었다. 박재석은 가져간 서류를 내놓고 “어르신이 직접 찍어주십시오”라고 들이밀었다. 김세호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도장을 꾹꾹 눌렀다. 

1950년 11월 1일 자로 호적이 정리되었다. 이제 박정희는 홀가분해졌다.  

11월 22일에 9사단 사령부는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했다. 김호남과 호적 정리가 된 박정희는 결혼을 서둘렀다. 하지만 결혼 경비가 문제였다. 어느날 박정희는 군수참모 김재춘 중령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김형, 당신이 우리 두 사람 약혼도 도왔으니, 결혼도 시켜주어야지.”

그래놓고는 한참 있다가 침울하게 말했다. 

“김형, 그런데 나 아무것도 없어.”
“아, 예, 알겠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세요.”

김재춘은 풍족한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다. 결혼은 12월 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하기로 결정되었다. 김재춘 중령은 결혼식장 준비를 하였고, 박정희의 대구 사범 동기생들도 결혼 준비를 도와주었다. 교육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두용규와 이성조가 중심이 되어 청첩장, 예물 준비등에 나섰다. 나중에 경북 교육감을 지낸 이성조의 증언이다. 

“피난 와서 고생하고 있는 박정희를 돕자는 뜻에서 대구에 사는 동기생들은 거의 다 모였을 것입니다. 마침 은사 김영기 선생이 대구에 계셔서 축사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박정희와는 만난 적이 없지만 허억 대구시장을 주례로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결혼식 날을 기다리던 육영수는 이즈음 재봉틀을 돌릴 때나 바느질을 할 때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중에 육영수 집안에서 유명해진 노래 가사는 이러했다.     

검푸른 숲 속에서 맺은 꿈은 
어여쁜 꽃밭에서 맺은 꿈은 
이 가슴 설레어라
첫사랑의 노래랍니다.  
그대가 있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나는 그대의 것이 되었답니다.
그대는 나의 것이 되었답니다. 

“아유, 그 노래 정말 지겨워라. 언니는 눈이 삐었구나? 얼굴도 새까만  그 사람이 뭐가 볼 게 있어? 오라는 혼처도 마다하더니 겨우 그런 사람한테 시집가려고 해?”  

육예수는 언니보다 키도 작고 얼굴도 검게 그을린 박정희에게 반한 육영수를 자주 놀렸다. 

이럴 때 마다 육영수는 정색을 하였다. 

“얘, 형부 될 사람에게 그러는 게 아냐. 저분은 다른 남자랑 뭔가 좀 다르지 않니? 난 어쩐지 자꾸 끌리는 면이 있어.” 

이즈음 박정희는 육영수에게 전처 김호남과의 이혼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13살이 된 딸 박재옥(1937-2020)에 대하여도 털어놓았다. ( 박재옥은 1948년에 어머니 김호남과 함께 집을 나와 대구로 갔는데, 어머니는 남자가 있었다. 6.25가 터지자 김호남은 박재옥과 함께 경주로 피난을 갔는데, 박재옥은 의붓아버지 밑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산 외갓집으로 갔다. 조금 있다가 박재옥은 사촌 오빠 박재석의 집에 보내졌다. 비로소 박재옥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육영수는 차마 아버지 육종관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하지만 박정희 와의 결혼에 극력 반대한 육종관은 이미 박정희의 호적을 떼보고는 더욱 거세게 딸의 결혼을 말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결혼날자를 받아 놓은 이경령과 육영수 모녀는 육종관으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지 못하여 끙끙 앓고 있었다.  

한편 결혼 날짜까지 받아 놓은 이경령과 육영수 모녀는 육종관으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지 못하여 끙끙 앓고 있었다. 며칠 후 이경령은 남편 육종관에게 넌지시 귀뜸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육종관은 육영수에게 박정희와 결혼하지 말라고 종용했다. 

“집안은 알아보았느냐? ”
“아뇨”
“이 전쟁통에 군인에게 시집을 가다니 될 법이나 할 소리냐?”
“ .... ”
“잘 생각해 보아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 두어라.”

다소곳이 앉아서 듣고만 있던 육영수는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육종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군인으로 그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게 다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육종관은 육영수를 설득할 수 없자 “너네 마음대로 하라”며 방을 나왔다. 

결혼을 이틀 앞둔 1950년 12월 10일, 송재천 중위가 군용트럭을 몰고 와서 옥천 육종관의 집 문을 두드렸다. 육영수 일가를 데리러 온 것이다. 육영수 모녀는 육종관에게 차마 결혼식을 올리러 대구로 간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때 육영수의 여동생 예수가 나서 육종관에게 말했다.     

육종관 : “예수야 너도 언니 결혼식에 갈 것이냐?”  
육예수 : “그럼요, 언니 들러리를 하기로 했는데요.”
육종관 : “너네 멋대로 해! 넌 오늘부터 내 딸도 아무것도 아니야”

육예수가 육종관으로부터 호통을 듣고 나오자,   육영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육종관은 대전으로 간다면서 집을 나가 버렸다. 

육영수와 육예수 그리고 모친 이경령은 대구로 떠나지 못하고 두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경령이 나섰다. 

“너의 아버지가 언제 네 결혼 걱정하는 것 보았니. 어서 너희들이나 먼저 가라. 나는 내일 아버지 모시고 갈테니.” 

하지만 11일 오후에 이경령은 혼자서 대구로 내려왔다. 전날 밤늦게 돌아온 남편 육종관과 싸운 것이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점잖게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서로 옆방에 앉은 채로 말다툼을 한 것이다. 

육종관 : 집안도 알아보지 않고 딸을 치우는 부모가 어디 있나?
이경령 : 영수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데도 가만히 있으란 말이에요? 

남편이 소실을 다섯이나 두었어도 순종한 이경령으로서는 이런 말다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이경령은 ‘조용한 반란’을 일으켰고, 끝내  헤어질 결심을 하였다. (육영수 결혼 후에 이경령은 사위 박정희 집에서 육영수와 함께 살았고, 육종관은 서울 사직동에 살던 큰 개성댁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한편 육영수는 10일 밤 10시에 대구에 도착했는데 차 안에서 심한 위경련을 겪었다. 11일에 육영수는 동생을 데리고 미장원에 갔다가 간밤의 고통으로 엉망이 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랐다. 육예수는 “언니, 내일이 결혼식인데 어떡하지?”하고 울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1917∼1979) 대통령과 육영수(1925∽1974)여사의 결혼식은 12월 12일 오후에 대구 계산 성당에서 치러졌다.  박정희 가족은 큰형 박동희, 조카 박재석, 박영옥(셋째 형 박상희의 딸, 김종필의 부인)이 참석했고, 육영수 가족은 결혼을 반대한 부친 육종관은 끝내 불참했다. 

대구시장 허억이 주례석에 오르자 모닝코트를 입은 박정희가 입장했다. 육영수는 꽃바구니를 든 두 소녀를 앞세우고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은사 김영기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육영수의 들러리는 김재춘 중령의 부인 장봉희와 육예수였다. 

허억은 신랑, 신부가 입장하자 엄숙한 목소리로 주례사를 하였다.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

이러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신랑, 신부를 만나지 않고 주례를 섰던 허억이 이름을 바꿔 부른 것이다. 흔히 '정희'는 여자 이름, '영수'는 남자 이름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사진 결혼식 사진 (출처: 조갑제 지음, 박정희 2- 전쟁과 사랑) 

박정희는 결혼식 다음 날 사단사령부로 출근했다. 신혼여행은 아예 없었다. 신혼집은 방 3칸 자리 셋집이었다. 큰방은 박정희, 작은 방은 이경령과 육영수·육예수, 세 번째 방은 운전병과 부관이 썼다. 


( 참고문헌 )

o 이현희, 박정희 평전, 효민디앤피, 2007
o 전인권 지음, 박정희 평전, 이학사, 2006
o 조갑제 지음, 박정희 2- 전쟁과 사랑, 조갑제 닷컴, 2007 
o 홍하상 지음, 대한민국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작은 키나무, 2005

대구 근대화 골목
계산대성당
계산 대성당 표시석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 1953년생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회)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 2011.9-2013.6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 저서로는 <대한제국망국사 (2023년)>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평전 (2023년 비매품)> <아우슈비츠 여행(2017년)>,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년)>,<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