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 김일손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13회 김일손, 사육신 사건을 사초에 올리다.

김세곤 2023. 12. 20. 19:13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13김일손, 사육신 사건을 사초에 올리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1498712일에 유자광의 심문에 대한 김일손의 진술은 계속된다.

 

"신의 사초(史草)에 기록한 바 황보(皇甫()이 죽었다.’ 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소릉(昭陵)의 재궁(梓宮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었고,

이개(李塏최숙손(崔叔孫)이 서로 이야기한 일과 박팽년(朴彭年) 등의 일과 김담(金淡)이 하위지(河緯地)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과, 이윤인(李尹仁)이 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과,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은 모두 고() 진사(進士)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

(14987125번째 기사)

 

김일손의 진술에서 이개·박팽년·하위지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니 14566월의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이 있다. 먼저 김일손에게 말을 전해 준 고() 진사 최맹한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최맹한은 세종 때 4군을 개척한 최윤덕(1376~1445) 장군의 손자이고, 이개와 이야기한 최숙손의 아들이었다. 그는 1456626일에 단종 복위운동 관련과 관련하여 부친 최숙손, 친척 최계한과 함께 고신(직첩 告身)이 거두어지고 먼 지방에 안치되었다. (세조실록 1456626)

 

이어서 최맹한은 145822일에는 이배되었으며 (세조실록 145822), 10년 후인 14687월에 또 다시 유배지가 옮겨졌다.

(세조실록 1468721)

 

그런데 146896일에 최맹한은 유배에서 풀려났는데, 이는 세조의 병이 악화되자 계유정난 이래의 난신 2백여 인을 방면한 것이었다. 이후 3년이 지난 1471(성종 2) 23일에 최맹한은 고신(告身)을 돌려받았다.

 

그러면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한 김일손의 진술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이개와 최숙손(崔叔孫)이 서로 이야기한 일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고 최숙손은 최윤덕(1376~1445)의 맏아들인데 무과에 급제하여 1444(세종 26)에 경상우도 절제사가 되었고, 1455(단종 3) 전라도 절제사가 된 데 이어 세조가 즉위하자 중추원 지사가 되었는데, 1456(세조 2)626일에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아들 최맹한과 함께 직첩이 거두어지고 유배되었다. 1)

 

둘째, 박팽년 등의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사육신 박팽년은 부친 박중림, 형제들인 박인년·박기년·박대년·박영년, 박팽년의 아들 박헌 · 박순 · 박분, 매제 봉여해가 모두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

 

셋째, 하위지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김담(金淡)이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다.

 

넷째, 이윤인(李尹仁)이 박팽년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다섯째,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홍재전서등 여러 사료에 자세히 나와 있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60권 잡저(雜著) 7’을 읽어보자.

 

정단(正壇) 32

 

증 이조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판서 중림(仲林)의 아들이며, 자는 인수(仁叟)이다. (중략) 병자년(1456, 세조 2)에 성삼문 등과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수감되었을 적에,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몰래 타이르기를, “네가 나를 섬기면 마땅히 너를 사면하리라.” 하니, 팽년이 웃으며 대답도 않고, 상을 부를 적이면 그때마다 나리(進賜)’라고 하여, 상이 그대가 일찍이 나에게 신하라고 하고서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자, 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나리의 신하라는 말이오. 저번에 관찰사로 있을 적의 장독(狀牘)에도 신()이라 일컬은 적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장독을 비교하여 보니 모두 ()’ 자였다. 옥중에서 죽자 광묘(세조)가 일컫기를, “팽년 등은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 하였다. (후략) 숙종 신미년(1691, 숙종17)에 복관되었으며, 영종 무인년(1758, 영조34)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후략)”

 

145663일에 세조는 믿었던 신하들이 반역 했다고 생각하여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집현전 학사 출신 박팽년 · 하위지 등의 재주를 아껴서 그들이 죄를 뉘우치면 살려줄 생각도 있었다. 세조는 비밀리에 신숙주를 시켜서 박팽년과 하위지를 회유했다. 신숙주는 의금부 감옥에서 은밀하게 박팽년부터 만났다. 신숙주는 집현전 시절부터 박팽년과 친했으니 말이 통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팽년은 죽음의 길을 택했다. 신숙주는 하위지도 접촉했으나 하위지는 반역자는 응당 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고, 이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박팽년 등은 의금부 감옥 안에서 그 유명한 사육신 충의가또는 육신애상가(六臣哀傷歌)’를 불렀다.

 

먼저 박팽년이 읊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 듯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아 가실 줄이 있으랴

 

이개도 폐부를 도려내는 애잔한 시를 읊었다.

 

창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가

저 촛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더라.

 

사육신, 이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화신(化身)이었다.

 

1) 한편 최숙손의 동생 최영손은 강원도 영월 장릉(단종의 능) 장판옥에 조사위(朝士位) 186인 중 한 명으로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