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25) 반탁의 소용돌이속에서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25) 반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1945년 연말에 서울은 ‘신탁통치 반대 (반탁)투쟁’으로 격랑(激浪)에 빠졌다. 반탁 투쟁에 불을 지핀 것은 동아일보였다. 12월 24일부터 동아일보는 연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대해 보도를 했고,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 회담이 열렸다. 이 회의에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다.) 소련이 청진과 원산에 특별 이권을 요구한다는 반소(反蘇) 기사를 실었다. 25일에 동아일보는 소련이 대일참전의 대가로 한반도를 차지하려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26일에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워싱턴에서 오는 통신에 의하면 조선의 신탁통치안을 주창하는 사람이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은 이 안을 거부하고 완전 독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트루먼 대통령,번즈 국무장관, 연합국 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은 다 조선 독립을 찬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적의 교묘한 선전으로 ‘우리 한민족은 외국 세력이 강요하는 것에는 무엇이나 복종하는 민족’이라는 선입 관념을 타민족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는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명예를 대단히 손상하는 정책을 시행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합니다.”
(김기협, 해방일기 2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 너머북스, 2011, p 296)
12월 27일에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관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 밤 합동 지급보”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1권, 인물과 사상사, 2004,
p 146)
이날의 동아일보의 기사는 다른 신문들의 비분강개형 선동과 더불어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선일보는 12월 27일 자 사설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에서 “신탁보다 차라리 우리에게 사(死)를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윽고 이 날 우익의 한민당과 국민당이 신탁통치 배격을 결의했다.
28일에도 국내신문은 소련을 맹렬히 비난했다. 조선일보는 <죽음으로 신탁통치에 항거하자>는 제목의 호소문을 실은 호외까지 발행했다. 동아일보 12월 28일자는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과 각 방면의 반대 봉화>라는 제목 아래 임정, 한민당, 국민당등의 신탁결사반대 의견을 게재했다.
28일에 좌익과 우익 공동으로 신탁통치반대국민 총동원위원회가 구성되어 신탁통치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해 있음을 다시 한번 선언한다.”며, “5천 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는 자기의 정치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탁지 세력을 배격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우리들의 혁혁한 혁명을 완수하려면 민족이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라고 절규했다.
(강준만 저, 위 책, p 147-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