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근현대사 기행] 대구 근대골목투어(3)-박정희와 육영수의 맞선
[김세곤의 근현대사 기행] 대구 근대골목투어(3)-박정희와 육영수의 맞선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3.11.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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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소령으로 복직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하였다. 그런데 ‘6.25 전쟁’은 대한민국에겐 불행이었지만, 박정희에겐 천운(天運)이었다. 박정희는 ‘6,25 전쟁’ 때문에 소령으로 복직하였고, 충북 옥천의 부자 집 규수 육영수와 대구에서 결혼한 것이다. 조갑제는 ‘김일성이 박정희를 살렸다’고 적었다.
그러면 박정희(1917∼1979) 전(前) 대통령과 육영수(1925∽1974) 여사의 결혼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6월 25일 새벽 4시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김일성의 명령에 북한군은 평화로운 일요일 새벽에 남한을 전면 침략한 것이다. 육군 본부가 전면전이란 결론을 내린 것은 25일 오전 9시가 지나서였다. 오전 10시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에 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경회루 연못으로 낚시를 간 뒤였다. 오전 10시 반 집무실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신장관이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고 말했다.
이 시각에 김종필 중위는 박정희 소령에게 연락을 취했다. 박정희는 사흘 전 고향 구미로 내려가면서 김중위에게 “정신 똑바로 차려 근무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구미경찰서로 연락하라. ”고 못 박아 두었던 것이다.
1975년 6월 25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25년 전 그날을 회고하는 일기를 썼다.
“1950년 6월 25일 나는 고향 집에서 어머님 제사를 드리고 문상객들과 사랑방에서 담화를 하고 있었다. 12시 조금 지나서 구미읍 경찰서에서 순경 한 사람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왔다. 장도영 대령이 경찰을 통해 보낸 긴급 전보였다. ‘今朝未明(금조미명)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목하 전방부대는 적과 교전중 급히 귀경’이라는 내용이었다.
새벽 4시에 38선에서 전쟁이 벌어졌어도 12시까지 시골동네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리에는 라디오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했다. 경부선 상행 열차에 병력을 만재한 군용열차가 계속 북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일 야간 북행 열차를 탔으나 군병력 전송(前送)관계로 도중 역에서 몇 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 열차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7시경이었다. ... 용산 육본 벙커내에 있는 작전 상황실에 들어가니 25일 아침부터 밤낮 2주야를 꼬박 새운 작전군, 정보국 장교들은 잠을 자지 못해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고 질서도 없고 우와좌왕 전화통화로 실내는 장바닥처럼 떠들썩하기만 하였다.”
박정희가 서울 용산 육군본부로 돌아온 27일 아침 국방 수뇌회의가 열렸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등 지휘관들에게 위스키를 한 잔 씩 돌린 뒤 비통한 말투로 서울 포기를 선언했다.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런데 이선근 정훈국장이 일어나더니 매우 선동적인 발언을 했다.
“해주를 점령하고 북진 중이라느니 27일에는 미 공군기 100대가 지원하러 온다고 발표해 놓고 시가전도 하지 않고 물러난다니 말이 되는가. 임진왜란때 선조가 맨 먼저 피난하여 민심이 흩어진 것을 잊었는가.”
다른 참모들도 이선근에 동조하자 채병덕 총장은 즉흥적으로 서울 사수를 선언했다. 회의가 끝난 후 채병덕은 김종필 중위를 불렀다. 밀봉한 봉투를 주면서 창동선을 방어하고 있는 유재흥 7사단장에게 보이고 답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편지는 ‘창동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김종필 중위가 지프로 창동으로 가니 대혼란이 빚어지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패잔병들이 도망가고 있었고, 7사단 사령부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장병도 없었다. 김졸필이 돌아와서 절망적 상황을 보고하자 채병덕 총장은 한숨만 쉬었다.
오전 11시에 채병덕 총장은 육본 참모와 재경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육본은 시흥 보병학교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육군본부 선발대는 낮 12시 반에 용산을 떠나 오후 2시에 시흥에 도착했다.
한편 북한군 전차 8대는 28일 새벽 1시에 길음교로 진입하여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전차가 서울에 들어오자 육본 지휘부는 공황 상태였다. 육본은 심야 탈출 하였는데, 박정희도 이 행렬에 끼었다.
새벽 2시 20분. 채병덕 총장 일행이 한강 다리를 지나 간 뒤에 한강 다리가 육군 공병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다리를 건너던 인파 행렬들은 아수라장이었다.
육본은 28일 오후 다시 수원으로 옮겨 수원 농업시험장에 작전 지휘 본부를 차렸다. 박정희와 김종필도 합류하였다. 이날 박정희는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의 도움으로 소령으로 복직되어 전투정보과장에 임명되었다.
# 박정희와 육영수의 맞선
6월 28일에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다. 북한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은 일장 연설을 하였다.
“이와같은 엄숙한 시기에 왜 남조선 인민들은 모두 떨쳐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모든 인민들은 하나같이 일어나 전 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북한은 전쟁이 일어나면 남로당이 대규모 봉기할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박헌영의 선동에 호응한 남로당원은 별로 없었다. 더구나 여순 14연대 사건 이후 군대 내 숙군 작업으로 남로당 출신 군인들의 봉기는 아예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6월 28일 서울 점령이후 3일간 머뭇거리면서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는 김일성의 최대 실수였다.
한편 김일성은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즉각 대응했다. 트루만은 해·공군을 운용하도록 지시하였으며, 6월 26일에 유엔 안보리는 공산군에게 무력도발 중지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한을 점령하여 부산-낙동강 전선만 남았다. 전투정보과장 박정희는 낙동강 전선 상황지도를 매일 바라보고 있었다.
8월 중순에 박정희의 대구 사범학교 1년 후배인 송재천 소위가 박정희를 찾아왔다. 송재천은 고향이 충북 옥천인데, 옥천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6.25가 터져 장교가 된 것이다. 박정희는 졸업하고 처음 보는 후배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자기 밑에서 포로 심문관으로 일하도록 하였다.
어느 날 송재천 소위는 박정희 소령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과장님 왜 혼자 사십니까. 가족이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고 위로도 될 것 아니겠습니까”
“글쎄, 좋은 색시가 있어야지.”
“제가 좋은 색시를 소개할까요.”
며칠 뒤 송재천은 박정희에게 옥천 외가 쪽으로 동생뻘 되는 육영수를 소개했다. 배화여고를 나온 옥천 부잣집 둘째 딸이고, 나이는 26세라 했다. ( 육영수는 박정희보다 8살 아래인데, 이현란과 동갑이다.)
“제가 보기에는 만점인데 과장님이 보시면 만점이 될지, 영점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저 ”그런 색시가 있느냐”고 말했다.
당시에 박정희는 이화여대생 이현란과 3년간 동거생활을 하다가 남로당숙군 작업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후, 이현란이 무단 가출하여 박정희는 그녀를 늘 못 잊어했다. 그는 술만 마시면 이현란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단다. 당시 육본 보급실장 김재춘 소령은 박정희에게 “제발 단념하시고 좋은 규수 만나 장가드십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며칠 뒤 송재천은 다시 육영수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박정희는 “그럼 한 번 만나 보기나 할까”라고 답했다.
송재천 소위는 그 길로 영도에서 피란살이 하고 있는 이모 이경령을 찾아갔다.
”이모님, 마땅한 자리가 있는데 영수 누이 출가 안 시키겠어요.”
“글세, 어떤 사람인데”
“제가 모시고 있는 상관입니다. 인품이 그만입니다.”
“성씨는?”
“고령 박씨입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인가?”
“청렴하고 강직하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조갑제 지음, 박정희 2- 전쟁과 사랑, p 128-131)
8월 하순이었다. 박정희 소령은 송재천 소위의 안내로 육영수 가족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영도의 일본식 2층 집을 찾아갔다. 충북 옥천 부자 육종관 내외는 이들을 맞았다. (그런데 박정희는 소주를 몇 잔 마신 상태에서 맞선을 보았단다.)
박정희는 허리를 구부려 군화 끈을 풀고 있었는데, 육영수가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훗날 영부인이 된 육영수 여사는 박목월 시인에게 첫 만남을 이렇게 술회 하였다.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예요. 얼굴보다 뒷 모습이 정직하거든요.” (이영호·문무일 지음,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 p 45)
이윽고 박정희는 육종관-이경령 앞에 앉고 육영수는 찻잔을 나른 뒤 부모옆에 단정히 앉았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고 있었다.
육종관은 박정희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수인사(修人事)에 불과했다. 얼마 후 박정희가 자리를 떴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육영수에게 여동생 육예수가 물었다.
“언니 어때요”
육영수는 달아오른 볼을 싸안으며 생글거리기만 했다.
“언니, 웃는 것 보니 마음에 들었나봐”
“글쎄, 콧날이 날카로워 성깔이 있어 보이더구나. 그런데 주관이 확고하게 서 있는 듯한 눈빛이야”
이 날 밤 송재천이 육영수를 찾아와 박정희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체격도 작고 볼 품은 없지만 마음은 아주 단단한 것 같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아주 좋던데요.”
송재천은 박정희에게도 맞선 본 소감을 물었지만, 박정희는 얼버무렸다.
김재춘 소령이 묻자 박정희는 “뭐, 키는 나보다 큰 것 같고, 보기는 봤는데 다시 만나봐야지, 뭐”라고 답했다.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원수가 성공리에 인천상륙작전을 완수하던 날 , 박정희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하여 대구로 올라가는 육본의 수송 지휘를 맡았다. 전황(戰況)은 점차 호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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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o 이현희, 박정희 평전, 효민디앤피, 2007
o 전인권 지음, 박정희 평전, 이학사, 2006
o 조갑제 지음, 박정희 2- 전쟁과 사랑, 조갑제 닷컴, 2007
o 이영호·문무일 지음,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 행복에너지, 2012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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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생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회)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 2011.9-2013.6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 저서로는 <대한제국망국사 (2023년)>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평전 (2023년 비매품)> <아우슈비츠 여행(2017년)>,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년)>,<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