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1) 8.15 해방- 4 소련의 북한 통치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1) 8.15 해방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 연재를 시작하면서
1945년 8월 15일에 조선이 해방되었다.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월 9일에는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남북은 분단되었다. 해방정국 3년(1945-1948)을 30회 연재 예정으로 자세히 살펴본다. -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선언했다.
7월 16일에 미국은 뉴멕시코 사막에서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그런데 일본은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양 전쟁을 이어갔다. 7월 26일에 미국의 투르먼,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에 나타나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꼬마(리틀보이)’라는 별명의 원자폭탄은 1,500미터 상공에서 섬광을 발하고 낙하해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시가지는 파괴되었고 20만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8월 8일에 소련이 재빨리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9일 새벽에 만주로 전격 진격했다.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지만 계속 미루었다. 그런데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승리를 확신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극동 장악에 나선 것이다.
8월 9일에 미군은 나가사키에 ‘뚱보(팻맨)’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이날 원폭으로 7만여 명이 사망했다. 한편 일본은 도쿄에도 원폭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문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8월 9일 한밤중, 도쿄의 작은 방공호 안에서 천황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최고위급 회의가 열렸다. 스즈키 수상은 내각 간사장에게 포츠담
선언을 낭독하도록 지시한 후, 토고 외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토고는 지체 없이 선언을 수락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군부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11명의 참석자들이 각자 의견을 개진했다.
다음날인 10일 새벽 2시, 히로히토 천황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모든 해안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의심스럽소. 연합군의 선언을 수락하자는 제안을 재가하오.”
8월 10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할 뜻을 밝혀오자, 미국 정부의 실무진은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을 38도 선으로 하였다. 38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SWNCC) 위원장인 국무 차관보 제임스 던은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Bonesteel)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승인을 받은 후,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일본군 항복안은 만주와 30도선 이북의 조선,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 극동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하고, 38도선 이남의 조선과 류큐 열도 및 필리핀에 있는 일본군은 미국 태평양육군 최고사령관에게 항복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편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히로히토 천황의 녹음된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옥음 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 또 내용도 알아듣기 매우 힘든 고문어체여서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 후 방송국 직원이 구어체로 재차 방송하여, 국민들은 항복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날 조선은 해방되었다. 함석헌 옹의 말처럼 ‘해방은 도둑처럼’ 뜻밖에 찾아왔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한 것이다.
( 참고문헌 )
o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비, 1999
o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1권, 인물과 사상사, 2004
o 김동춘 저, 대한민국은 왜? 1945-2005, 사계절, 2015
o 서중석 지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2) 건국준비위원회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1945년 8월16일 오후 1시 계동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위원장 여운형이 5천여 군중 앞에서 20여분 간 연설하였다.
8월 17일의 「매일신보」 기사를 읽어보자.
”조선민족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 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 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써 피를 흘린다는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승낙하였다.
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8,9,10월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명도해 달라. 3)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대해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분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각국은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 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기협 지음, 해방일기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너머북스, 2011, p 81-82)
그러면 여운형의 건준이 조선의 치안과 행정을 도맡게 된 경위를 살펴 보자. 1945년 8월 11일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안전 귀국과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1890∽1945)에게 치안과 행정을 맡아주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중경 임시정부만이 통치 권력 이양 권한을 갖고 있다면서 요청을 거부하였다. 14일에 총독부는 송진우와 가까운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여운형(1886∽1947)을 접촉하였다. 8월 14일에 여운형은 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로부터 15일 아침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의 필동 관저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여운형은 8월 15일 오전 8시 엔도와 만나 일본 측이 요구한 자주적 치안 유지와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고, 5가지 조건을 받아 내어 협상을 타결하였다.
이어서 여운형은 우익 지도자 송진우를 직접 찾아가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송진우는 “경거망동을 삼가라. 중경 정부를 지지하여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여운형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직접 싸워 온 거대한 세력은 국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 있는 3천만 민중이라면서, 임정은 해외에 30년간 머물면서 이렇다 할 업적이 없고 국내에 인민적 토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로 군림할 수 없으며, 임정은 많은 해외독립 단체가 만든 정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8월 15일 밤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 유지 및 행정권을 인수한 여운형은 조직 구성에 나섰다. 여운형은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을 발족시켰다.
건준 위원장은 중도좌파인 여운형, 부위원장은 중도 우파인 안재홍이 맡았다. 건준이란 명칭은 안재홍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건준의 강령은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한다.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정권의 수립을 기한다.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한다 등이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004, p 32-35)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3)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 오후 3시부터 경성중앙방송국은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1891-1965)의 연설을 20여 분간 방송했다. 안재홍은 건준의 결성 소식을 알리면서 질서유지를 위한 경비대와 정규병의 편성, 식량 확보와 배급, 통화와 물가 안정, 미결의 정치범 석방 등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이와 더불어 안재홍은 일본에 있는 조선 동포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가 절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안재홍의 라디오 연설은 8월 16일 오후 3시와 6시 그리고 9시 3번에 걸쳐 방송되었고, 건준의 존재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방송이 끝나자 안재홍은 휘문중학교로 이동했다. 송건호는 저서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에서 휘문중학교에서 본 안재홍을 묘사했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늦게 종로 계동 휘문중학 교정에 운집한 시민들 앞에서 말 할 수 없이 초라한, 어떻게 보면 걸인(乞人) 같은 모습의 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얼굴이 영양실조와 고생으로 윤기 없이 까맣게 탄 이 노신사야말로 민중의 존경해 마지 않는 민족지도자 안재홍이었다. 삼엄한 일제의 총검 치하에서, 그들의 온갖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끝내 조선 민족의 양심을 지킨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김기협, 해방일기 1, 너머북스, 2011, p 85)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신간회 창립에 간여했고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안재홍은 송진우, 여운형과 함께 변절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로 명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송진우나 여운형만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안재홍이 1950년 6.25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리라.)
15일과 16일에 건준은 전국적으로 정치범 및 경제범을 석방하는데 입회했다. 당시 석방된 죄수는 남한에서만 16,000여명이었다.
한편 건준은 16일에 건국치안대를 조직했는데, 여기엔 약 2천 명의 청년과 학생들이 동원되고, 100여명 이상이 지방치안대 조직을 위해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치안대는 지부가 전국에 걸쳐 162개소에 설치되어 8월말에는 경찰 대체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치안대는 일제의 주구 노릇을 했던 조선인 경찰관들을 추방하는 역할을 했는데, 8월15일부터 9월 8일 사이에 일제 강점기 경찰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 경찰관의 80% 정도가 쫒겨났거나 도망쳤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38도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이 확실해지자, 단 하루 만에 건준에게 준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어서 조선총독부는 ”민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일놉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일본 군인 3천 명을 동원해 특별 경찰대를 조직하고 건준이 접수한 경찰서 · 방송국 등을 다시 빼앗아 버렸다.
그런데 9월 7일 미군 진주 후에는 남한은 미군정 체제였기 때문에 안재홍은 뒷날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고 개탄했다.
한편 8월 16일 서울 종로 네거리 등에는 “근로대중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 달라”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한국 공산주의의 가장 위대한 영도자’로 불렸던 박헌영(1900∽1956)은 1942년 12월 일본 경찰이 검거망을 좁혀 오자 전라도 광주에 피산하여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일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박헌영은 8월 17일 서울에 돌아와 20일 명륜동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열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강준만, 한국현대근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 p 35-38, 57 )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4) 소련의 북한 통치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 소련의 북한 통치
8월 19일에 일본 관동군은 마침내 소련군에 항복했다. 이후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원산과 함흥에 진출했다. 8월 24일 함흥에 비행기로 도착한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8월 24일에 소련은 평양에 들어왔다. 8월 25일에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에서 ‘조선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몰아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1권, p 51)
8월 26일에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만식 위원장과 현준혁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장을 만나 행정권 이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위원장에는 조만식, 부위원장에는 현준혁이 맡았다.
이어서 평안북도는 8월 27일, 함경남도는 8월 30일, 황해도는 9월 8일에 인민정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다른 도에서도 인민정치위원회가 9월 말까지 결성되어 행정권을 장악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1권, 인물과 사상사, 2004, p 52 ; 김성보 외 2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4, p 17-25)
이처럼 소련군은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북한 정치인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제25군 사령부에 민정 담당 부사령관을 두어 정권을 세우는 일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안문석 지음, 북한 현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6, p 29)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한편 소련군은 8월 26일부터 38도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했다. 남과 북을 잇는 경의선, 전화 통신, 사람과 물자의 왕래 등 모든 것을 다 끊었다. 다만, 소련군은 북한 사람들의 남한으로의 이동은 한동안 모른 척 했다.
# 소련군의 강간과 약탈
1945년 해방 후에 이 말이 유행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 북한 주민들은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에 속았다. 소련군은 강간과 약탈등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다. 한마디로 ‘마오제’였다. (마오제는 함경도 사투리로 ‘막 굴러먹은 놈‘이라는 뜻이다.)
김학준은 『북한 50년사(1995년)』에서 “북한 점령을 맡은 제25군은 중앙아시아의 감옥에서 풀어내 징집한 죄수 출신 사병들이 많았다. ... 거지 떼 모양의 소련군은 강도와 강간의 길에 나섰다.
아무것이든 빼앗았다. 그들은 특히 시계를 좋아해 평양 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네댓 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일본 여자들의 경우에는 대낮에도 당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일본 여자들은 아예 머리카락을 완전히 깎고 얼굴에 숯검댕이를 바른 채 남장을 해야 했다. 마침내는 야밤에 조선 여자들도 당하기 시작했다. (강준만 저, 위 책, p 54)
브루스 커밍스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을 포함한 파괴행위를 저질렀으며 그것은 아주 광범위했다.”고 적었다.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 전쟁의 기원, 1986, p 492, 강준만 지음, 위 책, p 55에서 재인용 )
그런데 소련군은 개인적 만행 뿐만 아니라 점령군 차원에서 착취가 심각했다. 소련군은 북한의 주요 물자와 시설을 소련으로 반출해갔다. 북한 전체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본 것이다.
동유럽에 진주한 소련군이 그랬듯이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함흥과 원산, 진남포, 청진 등지의 대규모 공장에서 공작기계와 방직기계, 전동기 등을 가져갔다. 9월에 소련은 평양 고무공장의 기계를, 10월에는 수풍발전소에 있던 10만 kw의 발전기 3대를 뜯어갔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려던 발전소 기술자가 소련군의 총에 맞는 사고도 발생했다.
쌀도 대량으로 반출했다. 1945년에 244만섬, 1946년에 290만섬을 가져갔다. (안문석 지음, 위 책, p 25-27, 82) 브루스 커밍스는 “소련 점령하의 첫 몇 주일간 평양시장을 지낸바 있는 한근조에 따르면 소련은 인민위원회에서 비축한 식량의 3분의 2를 징발해 갔다”고 적었다. (강준만, 위 책, p 55)
그 밖에도 소련군은 1945년에 소 15만 마리, 말 3만 마리, 돼지 5만 마리를 반출했고, 1946년에는 소 13만 마리, 말 1만 마리, 돼지 9만 마리를 소련으로 가져갔다. 심지어 소련군은 1946년 1월 1일에 철도 시설을 경비하는 부대인 철도 보안대까지 창설했다. (안문석 지음, 위 책, p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