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43회-연산군의 폭정과 갑자사화 그리고 중종반정
무오사화와 김일손 43회
-연산군의 폭정과 갑자사화 그리고 중종반정
김세곤 (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1498년 7월 29일의 『연산군일기』는 계속된다.
“이날 대낮이 캄캄하여 비가 물쏟듯이 내리고, 큰바람이 동남방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며 기와가 날아가니, 성중 백성들이 놀라 넘어지고 떨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유자광은 의기가 만족하여 양양하게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자광의 위엄이 중외에 행해져서 조정이 독사(毒蛇)처럼 보고 감히 그 뜻을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자광은 바야흐로 제 세상인양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으니, 이욕만 즐기는 염치 없는 무리들이 따라 붙어 노상 문에 가득했으며, 유림(儒林)들은 기가 죽어서 들어앉아 탄식만 하고 있으므로 학사(學舍)는 쓸쓸하여 몇 달 동안 글을 읽고 외우는 소리가 없었다. 부형들은 그 자제를 경계하기를, ‘공부는 과거(科擧)에 응할 만하여 그만두어야 한다. 많이 해서 무엇하느냐.’ 하니, 식자들이 탄식하기를, ‘무술(戊戌)의 옥(獄 1478년에 임사홍과 유자광을 귀양 보낸 사건)’은 정류(正類)가 사당(邪黨)을 다스린 것이요, 무오(戊午 1498년 무오사화)의 옥은 사당이 정류를 모함한 것이다. 20년 사이에 일승 일패를 했는데 치(治)와 난(亂)이 따랐으니, 애석하도다! 군자의 형(刑) 쓰는 것은 항상 관완(寬緩 너그럽고 완만함)에 치우치고, 소인의 원망을 보복함은 반드시 잔멸(殘滅)하고야 말도다. 만약 무술년의 군자들이 능히 그 율(律)을 다 썼던들 어찌 오늘의 화(禍)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편 1498년 7월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본격화되었다. 삼사(三司)의 간쟁은 위축되었고, 연산군은 무소불위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사치에 탐닉했고, 사냥 · 연회 · 음행에 몰두했으며, 궁궐 보수와 민가 철거를 했다. 이는 민생과 국가 재정 파탄을 가져왔다. 특히 연산군의 음행은 예의(禮義)의 나라 조선에선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산군은 정업원에서 여승을 범하고, 양반과 신하들의 부인이나 딸까지 궁궐에 들게 하여 음행을 저질렀다.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갑자사화의 발단은 능상(凌上)이었다. 1504년 3월 11일에 홍귀달은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따르지 않자 그 날로 영월로 귀양 갔다. 이로부터 9일 후인 1504년 3월 20일에 1482년에 사사(賜死)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이 터졌다.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연산군에게 밀고했다. 이 날 연산군은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직접 쇠도리깨로 때려죽였고, 귀인 정씨 소생인 두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곤장을 때려 죽였다.
이어서 연산군은 폐비윤씨 사건 관련자를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물었다. 윤필상·이극균·성준·이세좌등을 사형에 처했고, 이미 죽은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이인형 등을 부관참시했다.
여기에서 무오사화의 주역 윤필상의 최후를 살펴보자. 그는 진도로 귀양 갔는데 연산군은 곧장 사자(使者)를 보내 윤필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전라도 진원(珍原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에서 윤필상은 의정부 낭청 전양필이 건네주는 연산군의 전지(傳旨)를 읽고서 ‘신이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종을 불러서 주머니 속의 비상(砒礵)가루를 꺼내어 술에 타서 두 번 절하고 마셨다. 그러나 한참 있어도 효과가 없으므로 명주 이불 한 폭을 가져다가 제 손으로 목매어 죽었다.(연산군일기 1504년 윤 4월 19일)
윤필상이 죽자 그의 시체는 열흘 동안이나 들판에 버려졌는데, 까마귀나 소리 개도 먹지 않았고, 이웃 개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야사(野史)에 전해진다.
그래도 분하여 연산군은 윤필상·한치형·이극균 등 12간(奸)에 오른 대신들의 집을 헐고 못을 파는가 하면 비를 세워 죄명을 기록했다.
그런데 불똥은 사림파에게도 번졌다. 이는 임사홍과 신수근의 작품이었다. 정여창·조위·남효온(1454∽1492)·허반·표연말 등은 부관참시되었고, 김굉필·최부·이심원·이유녕(이심원 아들)·이총·이주·임희재·성중엄·강겸· 강백진· 홍귀달· 이수공 · 내시 김처선 등이 처형되었다.
갑자사화로 화를 당한 이들은 239명이었는데 사형 96명, 부관참시 22명, 옥사·장살이 4명으로 전체의 51.1%에 달했고, 유배 106명 등이었다.
연산군은 이들의 자녀·가족·동족에 이르기까지도 연좌시켜 처벌하였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갑자사화는 훈구·사림을 막론하고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었고, 연산군의 폭정은 극에 달했다. 1504년 7월에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익명의 한글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연산군은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자행했다. 마침내 1506년 9월 2일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 등은 반정을 일으켜 임사홍과 신수근 등을 죽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었다.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되었고, 두 달 후인 11월 6일에 역질로 죽었다. 한편 중종은 무오사화로 화를 입은 김일손 등을 복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