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42회-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 (3)
무오사화와 김일손 42회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 (3)
김세곤 (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1498년 7월29일의 『연산군일기』는 계속된다.
“유자광은 오히려 옥을 다스리는 일이 점점 해이하여 자기 뜻을 미진할까 걱정하여 낮과 밤으로 단련(鍛鍊)할 바를 꾀했는데,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 권 책자를 내놓으니, 바로 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적하여 여러 추관(推官)들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악은 모두가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고,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글귀마다 풀이하여 왕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한 다음, 이어서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저훼(詆毁)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부도(不道)한 죄는 마땅히 대역(大逆)으로 논해야겠으며, 그가 지은 글도 세상에 유전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오니, 아울러 다 소각해버리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
그래서 김종직의 문집을 수장한 자는 이틀 안에 각기 자진 반납하여 빈청(賓廳 창덕궁 희정당 앞 카페) 앞뜰에서 불태우게 하고, 여러 도(道)의 관우(館宇)에 유제(留題)한 현판도 현지에서 철훼하도록 하였다. 성종께서 일찍이 김종직에게 명하여 환취정기(環翠亭記)를 짓게 하고 미간(楣間)에 걸었었는데, 그것마저 철거할 것을 청하였으니, 함양(咸陽)의 원한에 대한 보복이었다.”
김종직은 성종 15년(1484년) 7월에 창경궁 북쪽에 새로 들어선 환취정(環翠亭)의 기문을 지었다. 김종직은 「환취정기」에서 자연의 춘하추동의 절기와 질서를 인간의 본성인 인의예지와 결부시키고, 임금은 휴식하면서도 백성 생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사계절의 무늬와 빛깔에 어울리게 퍽이나 아름답고 부드럽게 풀었다.
당시 일화가 전한다. 성종이 기문을 여러 문신에게 맡겼는데 모두 낙제였고, 서거정만 겨우 '삼하(三下)'였다. 그래서 김종직에게 맡긴 것인데 김종직은 한 글자도 수정하지 않고 줄줄 써 내려갔다.
『연산군일기』는 이어진다.
“유자광이 왕의 노한 틈을 타서 일망타진(一網打盡)할 양으로, 윤필상 등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악은 무릇 신하된 자로서는 불공 대천의 원수이니, 마땅히 그 도당들을 추구하여 일체를 뽑아버려야 조정이 바야흐로 청명해질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도당이 다시 일어나서 화란(禍亂)이 미구에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니, 좌우가 다 묵연히 말이 없었는데, 유독 노사신이 손을 저어 말리면서 하는 말이 ‘무령(武靈)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저 당고(黨錮)의 일을 들어보지 못했소. 금망(禁網)을 날로 준엄하게 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족적(足跡)을 용납할 곳이 없게 하다가 한(漢)나라도 역시 망하고 말았으니, 청론(淸論)을 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하오, 청론이 없어지는 것이 국가의 복이 아니거늘, 무령(武靈)은 어찌 말을 어긋나게 하오.’ 하였으니, 무령(武靈)이란 유자광의 봉호(封號)이다.”
노사신이 언급한 ‘당고(黨錮)의 일’은 후한(後漢 서기 25-220) 말년에 황제 측근인 내시들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려고 선비들을 당인(黨人)이라 하여 모두 죽이고 금고(禁錮)하였다. 이를 당고(黨錮)라 한다. 그 결과 후한은 망하였다.
한편 1495년에 영의정에 올랐던 노사신은 무오사화가 일어난 지 40일 후인 1498년 9월 6일에 별세했는데, 『연산군일기』에 졸기가 실려 있다.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盧思愼)이 졸(卒)하였다. (...) 무오년(1498년) 9월에 병이 위독하자 왕이 승지 홍식을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노사신은 아뢰기를 ‘신은 말씀드릴 것이 없사옵고 다만 상과 벌을 적중하게 할 것과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기를 원할 뿐이옵니다.’ 하였다. 나이 72세였다. (...)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윤필상·유자광 등이 본시 청의(淸議)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일망타진하려고 붕당(朋黨)이라 지목하니, 노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하면서 ‘동한(東漢 후한을 말함)에서 명사들을 금고하다가 나라조차 따라서 망했으니, 청의가 아래에 있지 못하게 해서는 아니된다.’ 하였다. 그래서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 (후략)”(연산군일기 1498년 9월 6일 7번째 기사)
『연산군 일기』를 계속 읽어보자.
“유자광은 노사신의 말을 듣고 조금 저지되기는 했으나, 뜻이 오히려 쾌하지 아니하여 무릇 옥사(獄辭)에 연결된 자는 반드시 끝까지 다스려 마지 않으려 하니, 노사신이 또 말리며 말하기를, ‘당초에 우리가 아뢴 것은 사사(史事)를 위함인데, 지금 지엽(枝葉)에까지 만연되어 사사에 관계되지 아니한 자가 날마다 많이 갇히고 있으니,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지 않소.’ 하니, 유자광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급기야 죄를 결정하는 날에 노사신의 논의가 유독 같지 아니하니, 유자광은 낯빛을 붉히며 힐책하다가 각기 양론을 아뢰었는데, 연산군은 유자광 등의 의논을 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