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40회-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
무오사화와 김일손 40회
-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
김세곤 (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1498년 7월 28일에 연산군은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한치형을 좌의정, 성준을 우의정, 이극균을 좌찬성, 유지를 우찬성으로, 유자광을 숭록 무령군(武靈君)으로, 박건을 좌참찬으로, 노공필을 우참찬 신수근을 이조판서, 강귀손을 형조판서, 홍흥을 호조 참판, 오순을 공조 참판, 김영정을 대사헌, 박원종을 이조 참의, 성세명을 승정원 도승지, 정미수를 좌승지, 홍식을 우승지, 이세영을 좌부승지로, 권주를 우부승지로, 최한원을 동부승지 등으로 삼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8일 7번째 기사)
7월 29일에 사헌부가 ‘근일(近日) 간당(奸黨)을 베어 없앤 일에 있어, 윤필상등에게 상을 준 것은 진실로 당연하거니와, 다만 유자광에게는 이미 한 자급을 가했는데 그 아들 유진(柳軫)마저 당상(堂上)으로 승진시키고, 김자원은 내시로서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은 바로 그 직분이온데 역시 한 자급을 올린다는 것은 심히 온당치 않다.’고 하며 지평 정인인(鄭麟仁)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니, 우승지 홍식이 정인인에게 말하였다.
"지난날 임금께서 어서(御書)를 내려 ‘지금 관은(寬恩)을 베푼 일에 대하여 감히 그르다 하는 자는 법률에 의해 처단하고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임금의 분부가 이러한데도 감히 들어가서 아뢰겠는가."
이러자 지평 정인인은 두렵고 위축되어 마침내 물러갔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9일 2번째 기사)
그런데 이 날의 실록에는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이 실려있다. 이를 읽어보자.
“유자광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孽子]로 날래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나무를 원숭이와 같이 잘 탔다. 어려서 무뢰자(無賴子)가 되어,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재물을 다투기도 했으며 새벽이나 밤에 떠돌아다니며 길가에서 여자를 만나면 마구 끌어다가 음간(淫姦)을 하므로 유규는 그 소출이 미천한 데다가 또 방종하고 패악함이 이러하니, 여러 번 매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에서 파수를 보다가 상소하여 자천(自薦)하니, 세조가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발탁하여 썼다. 또 무자(戊子)년에 고변(告變)한 공로로써 훈봉(勳封)을 받아 1품(品)의 품계로 건너뛰었다. (무자년의 고변은 예종 즉위년(1468년) 10월 24일에 유자광이 남이(南怡, 1441~1468)의 역모 사실을 고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호걸 지사라 자칭하여 성질이 음흉하여 남을 잘 해쳤고 재능과 명예가 자기 위에 솟아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한명회(韓明澮)의 문호(門戶)가 귀성(貴聖)함을 시기했는데, 마침 성종께서 간하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기발한 언론으로써 왕의 좋아하는 바를 맞추고자 하여, 마침내 한명회가 발호할 뜻이 있다고 상소하였는데, 왕이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1476년 2월 19일에 유자광은 한명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뒤에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더불어 현석규(玄碩圭)를 밀어내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동래(東萊)로 귀양갔는데, 이윽고 석방되어 왔다. (1477년 7월에 현석규는 도승지가 되고 홍귀달은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임사홍도 우승지가 되었다. 때마침 조식(趙軾)의 누이동생이 이심에게 시집가서 일찍이 과부가 되자 조식은 그의 노비까지 모두 빼앗았다. 이후 조식의 누이동생이 전 현령 김주(金澍)와 혼인하였는데 조식은 이를 강간으로 김주를 무고하였다. 의금부는 조식을 무고죄로 신문하기를 청했는데, 홍귀달이 조식을 심문하는 것이 부당함을 성종에게 아뢰었다.
형방 승지인 현석규가 다음 날 출근하여 자신과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임금에게 아뢴 것에 노하여 소매를 걷어 올리며 ‘너’라고까지 하면서 홍귀달을 꾸짖었다. 이러자 대사간 손비장과 사간 박효원이 현석규의 행동을 비난했고, 임사홍과 현석규 간에 말다툼이 있었다. 유자광 또한 소를 올려 현석규를 탄핵하여 사건이 커졌다.
이에 성종은 무마책으로 임사홍을 대사간에, 현석규를 형조 판서에 임명했다. 그런데 지평 김언신은 현석규를 소인이라 말하였고 이후 유자광의 상소가 잇달았다. 하지만 현석규를 옹호한 성종은 1478년 5월 8일에 임사홍을 의주에, 유자광을 동래에, 박효원을 부령에, 김언신을 강계에 유배보냈다.)
그러나 성종은 그가 국정을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다만 훈봉(勳封)만 회복시킬 뿐 일찍이 일을 다스리는 소임을 제수하지 아니하니, 유자광은 은택(恩澤)을 엿보고 못하는 바가 없이 꾀를 부렸는데도 마침내 팔리지 않으니, 마음에 항상 불만을 품었었다. 그러던 중, 이극돈 형제가 조정에서 권세를 잡는 것을 보고 그가 족히 자기 일을 성취시킬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문득 몸을 기울여 아부하여 같이 서로 결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