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과 무오사화

무오사화와 김일손 31회- 권오복·권경유·이목의 공초

김세곤 2023. 7. 22. 08:17

무오사화와 김일손 31

- 권오복·권경유·이목의 공초

 

김세곤 (칼럼니스트)

 

722일은 국문 12일째였다. 이날 추관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관련하여 권오복·권경유를 심문하였다. 권오복이 공초하였다.

 

"지난 을묘년(乙卯 1495)에 김일손이 충청도 도사가 되어, 서울에 왔으므로 신은 그 집을 찾아가 함께 자면서 이야기하였사온데, 김일손이 김종직의 문집을 보여 주기에 서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논했습니다. 신의 원정(原情 사연을 하소연함)은 다 사초에 있사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7221번째 기사)

 

이 날 예조에서 조정 관리들이 가지고 있는 김종직의 문집을 모조리 압수하여 아뢰니,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대궐의 정원에서 불사르되 뭇 죄수를 모아다가 보여, 그 저술한 바도 차마 남겨둘 수 없는 의도를 알게 하라."

(연산군일기 14987222번째 기사)

 

이어서 추관이 권경유의 초사(招辭 진술조서)를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신의 사초에 김종직이 염정(廉靜)하고 조화하여 사문(斯文)으로써 자기 책임을 삼았으며,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문장은 다만 그 여사(餘事)이다.’라고 기재한 것은, 김종직의 문장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나은 자가 없다.’ 할 뿐더러 조위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그 시문을 신에게 부탁하여 뽑으라 하므로 신이 인하여 조의제문을 보았는데, 항우(項羽)가 영포(英布)로 하여금 비밀리에 의제(義帝)를 쳐 죽이게 하였으니 천하의 악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김종직은 본시 충의에 불타는 사람이므로 신의 생각에는 의제를 위하여 조문을 지은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습니다."

 

초사를 본 권경유는 천하의 악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는 구절 아래에 비록 만세 후라도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추관이 듣지 아니하니, 권경유는 붓을 던지고 서명(署名)을 거부했다. 급기야 권경유는 고문을 당했는데 그는 눈을 감고 아프다고 외치지 않고 끝까지 굴복하지 아니하니, 연산군은 듣고서 권경유는 강포(强暴)한 자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14987223번째 기사)

 

이어서 추관들이 권오복을 형장 신문하니, 권오복이 공초하였다.

"김종직이 의제(義帝)를 노산군(단종)에 비유하여 조문을 지었기 때문에 신도 사초에 그렇게 기재하였던 것이옵니다 ."

(연산군일기 14987224번째 기사)

 

723일에 연산군은 김종직이 저술한 점필재집(佔畢齋集)을 불사르라고 명령하였다.

 

724일에 이목이 공초하였다. 이는 712일에 의금부 관원 홍사호 등이 김일손의 집에서 찾아낸 이목의 편지에 대한 진술이었다.

 

신이 김일손에게 준 편지에 ()의 사초는 마침 동방(同房) 성중엄의 손에 있다.’고 한 것은, 신은 첫째 방이고 성중엄은 넷째 방 낭청이라 한 방에서 함께 거처하지만, 김일손의 사초는 성중엄의 방에 나뉘어 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옵니다.

당상이 날짜에 따라 기사(記事)를 아니한 것으로 말을 삼아 책()에 쓰려고 아니하므로, 나는 조석으로 성중엄을 문책(問責)하니, 성중엄은 오히려 계운(季雲 김일손의 자)의 사초가 한 자라도 기록하지 못할까 걱정했다.’고 한 것은 신이 중엄에게 묻기를, ‘일손의 사초가 네 방에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다. 다만 당상 윤효손이 날짜에 따라 기사하지 아니해서 어느 날 아래에 편입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말하고, 이극돈 역시 윤효손에게 김일손의 사초는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뜻이 모두 책에 쓰고자 아니한 것이기 때문에, 신이 성중엄에게 책하기를, ‘비록 날짜에 따라 기사는 안 되었을지라도 만약 당연히 써야 할 일이면 써야 한다.’ 하자, 성중엄은 말하기를, ‘나 역시 기록하고는 싶으나 다만 날짜에 따라 쓰지 아니하여 편차(編次)하기가 어렵다.’ 하고, 또 노상 펴 보면서 말하기를, ‘이미 익히 보았다.’ 하기 때문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윤효손이 매양 나에게 묻기를, ‘김모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고, 윤이 형의 사초를 본 뒤 말하기를 나는 김모가 이러한 인걸인 줄은 알지 못했다.’고 한 것은 윤효손이 일찍이 신에게 묻기를 일손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였고, 또 그 사초를 보고서 말하기를, ‘문장에 능한 자다하였기 때문에 이른 것이옵니다.

찬성 이극돈이 윤효손을 시켜 사초를 숨기게 하였으니, 그 섶을 안고 불을 끄는 어리석음과 비슷하다.’고 한 것은 이극돈이 윤효손으로 하여금 그 사초를 함봉하고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하였지만, 사초란 끝내 숨길 수 없는 것인데 이극돈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이른 것이옵니다.

매양 원하는 것이 선왕의 실록을 쓰고 여가로 밤에 돌아가 등불을 달아놓고 당세의 일을 써서, 형의 사업을 만분의 1이라도 하고 싶다.’고 한 것은, 신이 춘추(春秋)를 겸하여 기사(記事)로써 직업을 삼고 있사온데, 김일손의 기사가 세밀하고 자상하므로 신도 역시 일손에 비해 만에 하나라도 기주(記注)하고 싶기 때문에 이른 것이오며,

도리어 중한 앙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한 것은, 예로부터 사관(史官)들이 직필(直筆)로써 화를 받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7242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