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30회- 어세겸·이극돈 등 실록청 당상들이 변명 상소를 올리다.
무오사화와 김일손 30회
- 어세겸·이극돈 등 실록청 당상들이 변명 상소를 올리다.
김세곤 (칼럼니스트)
7월 21일은 국문 10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 날 실록청 당상 어세겸·이극돈·유순·홍귀달·윤효손·허침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변명하였다.
어세겸은 좌의정으로 실록청 감관사(監館事)이고, 의정부 좌찬성 이극돈, 예문관 제학 유순, 홍문관 대제학 홍귀달, 의정부 우참찬 윤효손은 실록청 지관사(知館事)이고 동지중추부사 허침은 실록청 동지관사(同知館事)였다.
" (...) 근일에 사관(史官)의 부도(不道)한 말을 늦게야 계품(啓稟)하였으니 달갑게 부월(斧鉞)의 베임을 받아야 합니다마는, 구구한 마음을 머금고 있을 수 없사옵기로 삼가 아래와 같이 진달하옵니다.
대체로 실록을 수찬하는 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시정기(時政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와 각 사(司)의 등록(謄錄)으로 무릇 상고할 만한 문서라면 모두 다 주워 모아서 연대(年代)를 나누고 방(房)을 나누어 각기 근정(斤正)하여 편집하게 하고, 여러 신하의 사초는 연월일에 따라 전문(全文)을 바로 써서, 그 사이에 넣으므로 편언척자(片言隻字 한 두 마디의 짧은 말과 글)라도 가감(加減)이 있을 수 없사오며, 편성하여 도청(都廳 실록청)에 올리면 도청은 각방(各房)의 당상관을 소집하여 함께 삭제 또는 채택을 의논해서 비록 적은 일이라도 적실하면 그대로 두고, 아니면 삭제하옵는데 하물며 국가의 대사에 있어서입니까.
신 등이 찬술한 바는 이미 함께 의논하여 삭제하였습니다. 신 등은 취사(取捨)한 것은 하나가 아니므로 지금 사초(史草)의 전문(全文) 두 조문을 별지(別紙)에 쓰고 또 인출된 정본(正本) 두 장에 표를 붙여 아뢰오니, 만약 보아주시오면 신 등의 버리고 취한 흔적을 환히 짐작하실 것이옵니다.
듣자오니, 어제 오방(五房)의 낭청(郞廳) 강경서·이수공이 권오복 등의 사초(史草)를 취한 것 때문에 모두 형장 신문을 받았다 하는데, 이것은 신 등이 미처 함께 의논하지 못한 바입니다. 강경서 등이 어찌 제 마음대로 취할 수 있사오리까? 신 등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아뢰오니, 바라옵건대 보아주시옵소서."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1번째 기사)
이러자 연산군은 추국관들에게 "이 말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그들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일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낭청이 만약 보았다면 당연히 도청(都廳)에 고했어야 할 것이온데, 지금 그렇지 못했으니, 그 사정을 심문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산군은 ‘알았다.’고 하면서 어세겸 등에게 전교하였다.
"내가 경(卿) 등을 그르다 하는 것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와서 보고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며, 강경서·이수공을 그르다 하는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은 부도(不道)한 일을 보았다면 마땅히 도청(都廳)에 고하여 함께 의논해서 삭제해 버렸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날 연산군은 대간(臺諫)을 다시 국문하라고 명했다. 사헌부 집의(執義)이유청·사간원 사간(司諫) 민수복·유정수·조형·손원로·신복의·안팽수·이창윤·박권 등이 공초하였다.
"신 등이 망령된 의논을 했을 따름이옵고, 딴 사정은 없사옵니다."
이들은 7월 17일에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 대부분이 능지처참이나 참형의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유청·민수복 등 대간들은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자는 가벼운 의견을 내놓았다가 곧바로 끌려 나가 그 자리에서 형장 심문을 당하고 형장 30대를 맞고 옥에 갇혔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2번째 기사)
이로부터 4일 뒤인 7월 21일에 이유청 등은 딴 사정이 없었다고 다시 진술한 것이다.
이들의 진술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대간 등이 스스로 이르기를, ‘임금과 더불어 시비를 다툰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선(善)을 진술하고, 사(邪)를 막아 버리는 것을 공(恭)이라 이른다.’ 하였지만, 큰일을 당하여 그 의논이 이와 같으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지금 만약 다시 신문한다면 마땅히 형장 신문을 해야 하겠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비록 다시 형장 심문을 한다 할지라도 어찌 딴 사정이 있사오리까. 다만 망령되게 사료한 것뿐일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이 진술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다시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율(律)에 참조하라. 또 이 무리들이 설사 살길을 얻었을지라도 특지(特旨)가 있기 전에는 다시 서용(敍用)하지 말라."
이어서윤필상 등이 장 1백 대에 유배 3천 리로 할 것을 아뢰니, 연산군은 "큰 죄가 결정되는 것을 기다려서 법대로 처단하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2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