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16회- 연산군, 세조의 일을 기록한 사초를 빠짐없이 들이도록 다그치다.
무오사화와 김일손 16회
- 연산군, 세조의 일을 기록한 사초를 빠짐없이 들이도록 다그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7월 17일에 연산군은 김종직의 제자 이주(李胄1468~1504)를 문초할 것을 전교하였다.
"이주도 역시 김종직의 제자다. 그가 간관(諫官)이 되었을 적에 일찍이 ‘성종은 나의 임금이온데 장차 어떻게 성종을 지하에서 뵈오리까.’ 하였으니, 그도 문초하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8번째 기사)
이주는 1495년 8월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그는 정언으로 있을 때 직언을 잘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주는 1495년 11월 23일에 헌납 김일손·정언 한훈과 함께 수륙재 금지를 청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23일)
7월 18일에 유자광은 김종직의 시를 읽은 조위등 6명을 국문하기를 청했다. 김종직의 문집에 사가독서(賜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조위 등에게 보냈다는 시(詩)가 있었다. 이 시에는 ‘육군(六君)의 성명이 이미 영(瀛 : 홍문관)에 올랐구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때 사가독서한 자가 무릇 6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자광은 이 시 구절은 ‘필히 동한(東漢)의 당인(黨人)들이 삼군(三君)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라 하여 6명에 대한 국문을 청하니, 연산군이 그대로 따랐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1번째 기사)
이 날 유자광은 실록청(實錄廳)에서 초(抄)한 사초(史草)에 누락이 있는가 의심하여 다시 수검(搜檢)할 것을 청하자고 하였다.
이러자 「성종실록」 편찬 시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한 성준은 "이는 우리들이 모르는 바이다. 무릇 사람들이 입계(入啓)하는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 독차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대사헌 강귀손도 불가하다 말하니, 유자광은 정지하였다.
이윽고 강귀손은 홍문관 수찬 남곤으로 하여금 좌중에서 말하게 하였다.
“지금 국옥(鞫獄)에는 위관(委官)이 있고 의금부도 있지만 일찍이 그 일을 힘써 주장하지 아니했는데, 힘써 주장한 자는 오직 무령군(武靈君 유자광이 예종 때 남이를 무고하고 받은 군호)일 따름이다. 비밀에 속하는 일은 진실로 단독으로 아뢰는 것이 당연하지만 만약 공공연한 일이라면 마땅히 공의(公議 공공연한 논의)를 거쳐서 아뢰어야 하는데, 사초(史草)를 다시 초한 일은 좌중이 모두 모르고 무령군만 단독으로 아뢰니, 상당히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유자광이 노하여 피혐(避嫌)할 것을 청했고 강귀손도 또한 그 뜻을 아뢰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지금 큰일이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으니, 경 등이 아뢰는 것은 수리하지 않겠다."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4번째 기사)
7월 19일에 연산군은 실록청 당상들에게 전교하였다.
"지금 서계(書啓)한 제신들의 사초 내에 무릇 세조 조에 간여된 일에 대해 누락이 있는 것이 아니냐? 다시 자상히 검토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러자 실록창 당상 이극돈·유순·홍귀달·허침·안침은 지금 중죄를 입어 집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춘추관(春秋官)은 대간(臺諫)과 더불어 다름이 없으니, 신 등이 임의로 사국(史局)에 들어가 상고(詳考)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역시 「성종실록」 편찬 시 감관사(監館事)로 참여한 어세겸이 아뢰었다.
"신은 비록 조율(照律)이 안 되었다 할지라도 죄가 이극돈과 동일하오니, 감히 피혐(避嫌)하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빨리 상고해서 아뢰도록 하라."고 다그쳤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1번째 기사)
연산군에게 혼쭐 난 실록청(實錄廳) 당상관들은 홍한, 신종호, 표연말의 사초에도 세조에 대한 불충한 말이 있음을 추가로 보고했다.
홍한의 사초(史草)에는, ‘세조께서 집권을 모의하여 몰래 무사(武士)와 결탁했다.’ 하였고, 신종호의 사초에는 ‘노산의 난(亂)에 정창손이 맨 먼저 계창하여 벨 것을 청했으니, 노산이 비록 세조에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정창손이 노산을 몸소 섬기었는데, 차마 제창하여 베자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표연말의 사초에는 ‘소릉(昭陵 단종 모친 능)을 헌 일들은 문종에게 저버림이 많았다.’고 보고했다. 이러자 연산군은 홍한과 표연말을 잡아 와 문초했다. 신숙주의 손자인 신종호(1456~1497)는 이미 죽어 문초를 면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5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