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과 무오사화

무오사화와 김일손 15회- 김종직, 도연명의 술주시를 화답한 시를 짓다.

김세곤 2023. 7. 1. 08:26

무오사화와 김일손 15

- 김종직, 도연명의 술주시를 화답한 시를 짓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술주(述酒 술을 이야기하다)시는 귀거래사로 유명한 은일(隱逸)시인 도연명(365427)이 지었다. 그는 동진(東晋 317~420)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420~479)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는데 당시는 난세였다.

 

동진 시대에는 군벌과 호족세력이 득세했다. 그리하여 환현(桓玄)을 토벌하여 중앙 정권을 장악한 유유(劉裕 363~422, 재위 420422)4207월에 동진의 공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송()이라 하였다.

 

도연명은 나이 56세 때에 유유가 공제를 시해한 일에 대하여 분개하는 마음을 은밀하게 나타내는 술주(述酒)시를 지었다.

 

그런데 김종직은 도연명의 술주시를 읽고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은 것이다. 김종직이 도연명의 술주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준 사람은 송나라 때의 학자인 동간(東澗) 탕한(湯漢)이다. 그는 이 탕한의 주소(注疏 해석)를 보고 나서야 이 시가 영릉(零陵)을 애도한 시라는 것을 알았다.

 

한편 윤필상이 술주 시를 해석하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으랴! 그 제자마저 모조리 추핵(推覈 죄인을 추궁하여 죄의 실상을 조사함)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러자 노사신이 수창(首倡)하여 윤필상·한치형과 아뢰기를,

 

"연루자는 마땅히 국문해야 할 것이오나 만약 제자라 해서 모조리 추핵한다면 소요가 날까 걱정이옵니다. 동한(東漢)이 당인(黨人) 다스리기를 너무 심하게 하여 종말에 쇠망하였으니, 지금 만연(蔓延)시킬 수 없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7174번째 기사)

 

이처럼 대신들이 우려를 표명하자, 연산군은 "김종직의 제자를 끝까지 추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알고자 하니, 모조리 써서 아뢰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김종직의 제자는 이미 김일손의 사초에 모두 기록되어 일찍이 내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러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그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의 제자 신종호 등 약간 명도 모두 김일손처럼 수업을 하였느냐, 그렇지 않는 자도 있느냐? 또 김일손의 말에 나머지 사람도 오히려 많다' 하였는데 누군가 물어보라."

 

연산군의 지시에 따라 윤필상 등이 김일손에게 물으니 김일손이 대답하였다.

 

"신종호는 김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는 김종직의 처남으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채수·김전·최부·신용개·권경유·이계맹·이주·이원은 제술(製述)로 과차(科次 과거 급제자 중 성적 우수자)를 받았고, 정석견·김심·김흔·표연말·유호인·정여창도 역시 수업하였는데 어느 세월에 수업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창신은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적에 종직이 홍문관 응교(應敎)로 있었는데, 이창신이 사기(史記)의 의심난 곳을 질문하였으며, 강백진은 김종직의 조카로서 젊었을 적부터 수업하였고, 유순정은 한유의 글을 배웠고, 권오복은 김종직이 동지성균(同知成均) 시절에 관에 거접하였고, 박한주는 경상도 유생으로서 수업하였고, 김굉필은 김종직이 상()을 만났을 때에 수업했습니다그 나머지도 오히려 많다고 한 것은 이승언·곽승화·장자건 등입니다."(연산군일기 14987176번째 기사)

 

이윽고 연산군은 실록청(實錄廳)에서 올려온 사초(史草)를 내보이니,

권경유가 기록한 것이었다.

 

그 사초는 이렇다.

 

"김종직이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충의(忠義)가 분발(憤發)하여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 문장은 여사(餘事). "

 

연산군은 "이 무리들의 기롱과 논평이 이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무릇 제자라 하는 자는 모조리 구금하여 국문하는 것이 어떠하냐?" 고 전교하였다.

 

이러자 윤필상이 연산군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아뢰었다.

 

권경유(?1498)1485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홍문관 정자를 거쳐,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으며, 1495년에는 외직을 청하여 제천현감이 되었다. 그는 성종 때 김일손과 함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