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12회 연산군, 「조의제문」을 한 구절 한 구절 풀이하다.
무오사화와 김일손 12회 연산군, 「조의제문」을 한 구절 한 구절 풀이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종직의 시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은 김종직이 죽은 다음 해인 1493년(성종 24)에 그의 제자이자 처남인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1494년에 원고를 더 모으라는 성종의 명이 있었으나 성종이 붕어하자 문집은 간행되지 못하였고 3년 뒤인 1497년(연산군 3)에 전라도 관찰사 정석견(鄭錫堅 1444∼1500)에 의하여 최초로 간행되었다.
조위(曺偉)의 아버지는 울진현령 조계문이고, 큰 누나는 김종직의 부인이었다. 조위는 147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 호조참판과 충청·전라도관찰사 그리고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조위는 1498년 4월 11일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 명나라로 갔다. 조의제문이 논의가 되고 있는 7월 15일에 조위는 명나라에 있었다.
정석견은 1474년(성종 5)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1485년에 이조좌랑에 올랐다.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참의를 역임했고, 1497년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러자 연산군은 “편집한 자나 간행한 자를 아울러 국문하도록 하라.”고 전교하고 강귀손에게는 “유자광의 말이 비록 그러하다 할지라도 경이 피(避)해서는 되겠는가?”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6일 1번째 기사)
이윽고 대사헌 강귀손은 사촌 이곤의 일로 대간들의 탄핵을 받자 피혐을 청했다.
"전일 대중(臺中)의 의논이 ‘병조낭청(兵曹郞廳)이 다 집을 지었으니, 당연히 국문해야 한다.’ 하기에, 신이 저지하기를 ‘좌랑(佐郞) 이곤(李坤)은 나의 사촌이요, 또 이곤이 새로 지은 집은 나의 첩이 새로 지은 집과 서로 잇대었는데, 이곤이 내 첩의 집에서 돌을 가져가기에 내가 말렸으나 곤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겨루지 않았으니, 겨루면 그 과실이 곤과 서로 상등하기 때문이다. 그 후 곤은 매양 다른 사람을 보면 나의 과실을 말했다는데, 지금 만약 그를 집 지었다고 국문한다면, 곤이 반드시 원망하여 내가 부탁하여 한 일이라 할 것이니, 묻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대중(臺中)에서 다시 전의(前議)를 발의하여 이곤의 집을 조사해 보기로 하니, 신이 처음에는 이 의논을 저지하였지만 지금에 이렇게 한다면, 여론은 신과 곤 사이에 ‘묵은 혐의가 있어서 그렇다.’ 할 것입니다. 신이 용렬한 몸으로서 직에 있기가 미안하오니, 청컨대 피하겠습니다."
이러자 연산군은 "피혐(避嫌)할 까닭이 없다."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6일 2번째 기사)
이렇게 연산군은 강귀손에게 너그러웠다.
7월 17일에 연산군은 전라도 도사(都事) 정종보에게 "도내에서 간행한 김종직의 문집 판본(板本)을 즉시 불태우라"고 명령하였다.
이어서 연산군은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조의제문」을 읽고 직접 풀이했다.
"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 시절에 과거에 합격했고, 성종 때에 이르러서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고, 끝에는 형조판서까지 이르러 은총이 온 조정에 가득하였다. 그가 병들어 물러가게 되자 성종께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말년을 잘 마치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제자 김일손은 사초(史草)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세조를 말함)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정축 10월(1457년)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 밀양의 옛 지명)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를 말함)에게 살해되어 침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심(心)은 진(秦)나라 말기 초나라의 왕 의제(義帝 ?~BC 206)이다. 그는 BC 208년에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이 초(楚)를 다시 세운 뒤에 회왕(懷王)으로 옹립되었다가 BC 206년에 항우(BC 232~202)에 의해 살해되어 침강(郴江)에 던져졌다.
이어서 연산군은 조의제문 본문을 읽고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하였다.
“ (...) 나는 동이족이요. 또 천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 양흔낭탐(羊狠狼貪) 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죽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 칠 아니했는고. (...)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 주자를 말함)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떨리는 마음을 공손히 가라앉히며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제사 지내니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글귀의 조룡은 진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왕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구절의 왕은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이 진(秦)을 치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김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 단종)에 비유한 것이다.
그 ‘양흔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양흔낭탐은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를 벤 데 비한 것이요.”
양흔낭탐(羊拫狼貪)은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인데 ‘항우의 말과 행동이 거친 것은 양 같으며 탐욕스럽기는 이리 같다’는 의미이다. 관군(冠軍)은 초의 상장군(上將軍) 송의(宋義)를 말한다. BC 207년에 항우는 송의가 제나라와 모의해 초나라를 배신하려 했다는 구실로 제멋대로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