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기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역사기행 (57) 야스쿠니 신사(5)

김세곤 2023. 6. 26. 19:22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역사기행 (57) 야스쿠니 신사(5)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3.06.26 14:58
  •  수정 2023.06.2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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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 제2도리를 지났다. 오른편에 있는 석등엔 러·일 전쟁 부조뿐만 아니라 상해사변(上海事變) 관련 부조도 있다. 

소화 7년(1932년) 1월 28일 상해 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 전투와 소화 7년(1932년) 2월 22일의 폭탄 3용사 부조가 있다. 이들 부조엔 글이 적혀 있어서 상해사변 관련임을 알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석등. 사진=김세곤 제공
소화 7년 1월 28일 상해 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 부조. 사진=김세곤 제공

상해사변(上海事變)은 1932년 1월 28일 상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와 중국 제19로군(路軍)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소화 7년 2월22일 폭탄 3용사 부조. 사진=김세곤 제공
부국징병보험상호회사가 부조 건립, 소화 10(1935)년 11월22일. 사진=김세곤 제공

이에 앞서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 관동군 일부 장교들이  봉천 외곽 북쪽 7.5km 떨어진 류탸오후(柳條湖)에서 만철 철도를 폭파시켰다. 

관동군의 자작극인 철도 폭파 규모가 매우 미세해, 폭발 30분 이후 특별열차가 시속 80km로 통과할 정도였으나 애초에 명분용이었기에 폭발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상부의 어떠한 지시도 없이 독자적으로 일을 저지른 관동군 일부 장교들은 여순의 관동군 사령부에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거짓 보고를 올렸다. 이에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사령관은 무장 해제 정도의 조치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관동군의 참모들은 관동군의 전면 출동과 조선군의 증파까지 요청하도록 사령관에게 압력을 가하여 시게루 사령관은 이를 승인했다.

9월 19일 아침, 도쿄에서 열린 육군 수뇌회의는 관동군의 행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어진 각료 회의에서 시데하라 외상이 관동군의 계획적인 행동이란 발언을 하고, 육군대신이 조선군 증파를 주저함에 따라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하지만 9월 21일이 되자 사태는 순식간에 급변했다.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쥬로는 천황의 재가도 없이 1개 여단과 2개 비행 중대를 급파한 것이다. 한편 일본 신문들은 관동군의 행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관동군의 행동에 대해 '신속한 조치를 취해주어 마음속 가득 찬 사의를 표명한다'라고 대서 특필했다. 
 
결국 22일에 각료회의는 조선군 출병을 추인하고 이번 사건을 ‘사변’으로 취급하였다. 사실상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후 관동군은 봉천, 장춘, 지린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남만주를 통째로 삼켰다. 

한편 만주사변 이후 중국 대륙에 항일운동이 확대되었고, 특히 상해의 정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932년에는 상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중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1932년 1월 28일에 상해사변이 일어났다. 일본 해군 육전대 및 항공부대 1833명이 상해만에 상륙하여 3만3000명의 중국군 19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은 열세였으나 2월 중순에 2개 사단의 육군을 증파하여 3월 1일에 중국군이 퇴각하였다. 사상자는 중국측이 1만4326명, 일본 측은 3091명이었다. (가토 요코 지음·김영숙 옮김,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p 154- 155) 

이후 일본은 3월 1일에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 1906~1967)에게 통치권을 부여하면서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 국가로 만들었다.

4월 29일에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축하 행사와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 기념식이 열렸다. 이때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해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등이 폭사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2월 19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나이 24세였다.)

1932년 5월 5일에 상해 조계에 통치권을 가진 서구 열강에 의해 중ㆍ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중국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 등 일본의 무력 침략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제소하였고, 리턴조사단이 파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리턴조사단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고발하였고, 이에 따라 국제연맹 총회는 일본을 제재하고자 했다. 그러자 1933년 3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침략전쟁을 이어나갔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파탄 속에서 일본 국민은 침략전쟁을 통해 실의를 해소하며 열광했다.(정혜선 지음,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p 349-350)

한편 야스쿠니 신사에는 러·일 전쟁 전사자 8만8429명, 만주사변 전사자  1만7176명, 중일전쟁 전사자 19만1250명이 합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o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어문학사, 2012
o 정혜선 지음,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1 
o 이시카와 요시히로 지음· 손승희 옮김 , 중국 근현대사 3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 삼천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