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 7회 – 유자광, 김일손을 축조 심문하다
무오사화와 김일손 : 7회 – 유자광, 김일손을 축조 심문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년 7월 12일에 김일손과 허반을 친국한 연산군은 윤필상 등에게 명하여 김일손을 빈청(賓廳)에서 국문하게 하였다. 이러자 유자광이 사초(史草)를 가지고 김일손은 축조(逐條 : 한 조목, 한 조목씩) 심문했다.
김일손은 조목조목 진술하였다.
"신의 사초(史草)에 기록한 바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 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로써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소릉(昭陵)의 재궁(梓宮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에게 들었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5번째 기사)
‘황보(皇甫)·김(金)이 죽었다’ 한 것은 ‘황보인과 김종서가 죽었다’ 는 것인데 이는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나중의 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과 관련이 있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에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철퇴로 김종서를 쓰러뜨렸다. 북방육진 개척에 공을 세운 대호(大虎) 김종서를 기습공격으로 무너뜨린 수양대군은 곧바로 왕명을 빙자하여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을 궁궐로 불렀다. 그리고 미리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등과 모의하여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영의정 황보인 등을 죽였다. 이 날의 성공한 쿠데타가 바로 계유정난이다.
한편 수양대군은 1455년 윤 6월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세조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은 유교 정치이념으로 볼 때 명분과 정통성, 도덕성에 하자가 있었음은 분명하였다.(신병주 지음,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2009, p 67)
이어서 김일손은 소릉(昭陵)의 재궁(梓宮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소릉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의 능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7월 23일에 단종을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별세하여 경기도 안산 와리산에 묻혔는데 능호를 소릉이라 하였다.
그런데 1457년 6월 21일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자 세조는 현덕왕후 권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고 소릉을 폐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1457년 가을, 세조가 하룻밤에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소릉을 파헤쳐 관곽을 강물에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은 것은 1457년 9월 2일이고, 단종이 죽은 날짜는 1457년 10월 24일이다.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연려실기술』은 ‘가짜 뉴스’이다.
그러면 소릉의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을 김일손에게 전한 조문숙(趙文琡)은 누구인가? 조문숙은 「성종실록」에 25회 나온다. 눈여겨볼 일은 1485(성종 16년) 3월 안산군수 시절에 그는 ‘동궁(東宮)의 역사(役事)에 수군(水軍)을 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는 밀봉(密封)한 의견서를 성종에게 직접 올렸다. (성종실록 1485년 3월 7일)
이처럼 조문숙이 안산군수를 하였으니 안산에 있던 소릉이 파 헤쳐진 것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았으리라.
한편 김일손은 “이개·최숙손이 서로 이야기한 일과 박팽년 등의 일과 김담(金淡)이 하위지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과, 이윤인이 박팽년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과,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은 모두 고(故) 진사(進士) 최맹한(崔孟漢)에게 들었다."고 말하였다. (1498년 7월 12일 5번째 기사)
김일손의 진술에서 이개 · 박팽년 · 하위지 등 사육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는 1456년 6월의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이 있다. 먼저 김일손에게 말을 전해 준 고(故) 진사 최맹한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최맹한은 세종 때 4군을 개척한 최윤덕(1376~1445) 장군의 손자이고, 최숙손의 아들이었다. 최맹한은 1456년 6월 26일에 단종복위운동 관련과 관련하여 부친 최숙손, 친척 최계한과 함께 고신(告身 직첩)이 거두어지고 먼 지방에 안치되었다. 이어서 최맹한은 1458년 2월 2일에는 이배되었고, 10년 후인 1468년 7월에 또 다시 유배지가 옮겨졌으며 (세조실록 1468년 7월 21일), 1468년 9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는 세조의 병이 악화되자 계유정난 이래의 난신 2백여 인을 방면한 것이었다. 이후 3년이 지난 1471년(성종 2년) 2월 3일에 최맹한은 고신(告身)을 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