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역사기행 (54) 야스쿠니 신사(2)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역사기행 (54) 야스쿠니 신사(2)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3.05.3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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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의 유래는 1869년 6월 29일에 세워진 쇼콘샤(招魂社)이다.
1875년 2월 21일의 제4회 초혼식에는 대만 출병 전몰자 12명이 합사되었고, 1876년 1월 26일의 제6회 초혼식서는 강화도(운양호) 사건 전사자 1명이 합사되었다. 이 두 전쟁은 식민지 획득을 위한 대만과 조선 침략이었다.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현대송 옮김,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역사비평사, 2005, p 86-87)
먼저 대만 침략부터 살펴보자. 1871년 10월, 류큐 미야코섬에 공물을 수송하고 귀환길에 올랐던 류큐 선박이 태풍으로 인해 조난을 당했다. 승무원 69명은 표류를 하다가 대만 남부에 도착했다. 표착한 승무원 66명(3명 익사)은 타이완 원주민에게 납치되었다. 12월 17일에 원주민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자 조난자들은 마을에서 도주했고, 원주민들은 도망자를 적으로 간주하여 54명을 참수하였다. 생존자 12명은 구조되어 미야코섬으로 귀환했다. 이러자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에게 배상 등을 요구했지만, 청나라 정부는 관할 지역 밖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부했다.
그런데 1873년에는 오카야마현 구라시키 시의 선박이 대만에 표류하다가 승무원 4명이 약탈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메이지 정부 안팎에서 대만 정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1874년 1월 이와쿠라 도모미 암살 미수 사건, 2월 에토 신페이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내정 불안이 고조되었다. 이러자 메이지 정부는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만 정벌을 결정했다.
1874년 5월 2일에 일본 군함 3척이 나가사키에서 대만으로 출병하였다. 5월 6일에 일본군은 대만 남부에 상륙하여 대만 원주민과의 사이에서 분쟁이 생겼다. 5월 22일, 대만 서남부 사료항(社寮港)에 전군을 집결시키고, 본격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6월 3일에는 무단사(牡丹社) 등 사건 발생 지역을 제압하고 현지의 점령을 계속했다. 전사자는 12명이었다. 아울러 일본군은 아열대 지역 풍토병인 말라리아 창궐로 인해 561명의 병력이 병사했다.
다음은 조선 침략이다. 1875년 8월 20일(양력 9월 20일)에 강화도 조약의 빌미가 된 운양호(雲揚號) 사건이 일어났다. 운양호는 해로 탐사를 구실로 서해를 거쳐 강화도까지 올라갔다. 8월 20일 오후에 운양호 선원 14명이 보트를 타고 강화도로 접근하자 초지진에서 포격을 가했다. 초지진 포대의 사정거리 밖에 있었던 운양호는 기다렸다는 듯 함포 사격을 하였다. 8월 22일 오전 8시경 중무장한 일본 해군 22명이 영종도에 상륙했다. 이러자 영종첨사 이민덕과 600명의 관민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했다. 일본군은 조선군 35명을 죽였으며 17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일본 측은 전사 1명, 부상 1명뿐이었다. 8월 28일에 운양호는 유유히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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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77년 2월에 세이난 전쟁 (西南戦争)이 일어났다. 1873년 10월의 ‘정한론 정변’은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의 승리로 돌아갔다.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8~1877), 에도 신페이 등은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런데 에토 신페이는 1874년 2월 16일 새벽 사가현청을 급습하여 이틀 만에 점령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정부군에 패하여 4월 13일에 참수 당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향인 가고시마에서 사학교(私學校: 일종의 군사학교)를 세우고 사족(사무라이)의 자제를 모아 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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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가 군사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1877년 즈음에는 재학생이 2만명에 이르렀다. 이러자 몰락 일로에 있던 사족의 반정부 분위기가 사학교를 중심으로 고조되었다.
정부에서는 사이고의 움직임을 정탐하는 한편 1877년 1월에 가고시마현이 보유하고 있는 병기와 탄약을 오사카에 운반토록 명하였다.
이러자 사학교의 생도는 화약고와 조선소를 습격하여 정부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였고, 사이고는 2월 15일 1만5000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구마모토로 진격하였다. 구마모토로 진격하는 동안 규슈 각지에서 사족이 가세하여 병력이 3만명으로 늘어났다.
처음에 사이고 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구마모토성을 포위하였다. 급보를 접한 정부 수뇌들은 구마모토 성 사수를 명하였고, 구마모토 사령관은 끝까지 버티었다. 정부 토벌군이 구마모토성과 연락하여 세력을 만회하게 되자, 사이고 군은 후퇴하여 가고시마로 퇴각하였다. 패한 사이고는 정부군의 추격 끝에 가고시마에서 저항하다가 1877년 9월 24일 동굴에서 할복자살했다. 세이난 전쟁으로 사무라이 계급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여담이지만,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세이난 전쟁이 배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