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역사기행 (53) 야스쿠니 신사 (1)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일본역사기행 (53) 야스쿠니 신사 (1)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3.05.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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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정국신사 靖国神社)에 공물을 보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는 이날 시작된 야스쿠니 신사의 춘계 예대제(例大祭·큰 제사)를 맞아 공물을 봉납했다. 기시다 총리가 취임 후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한 것은 이번이 5번째다. 그는 취임 직후인 2021년 10월 추계 예대제에 마사카키를 봉납했으며, 지난해 8월 15일 일본 패전일에는 다마구시료라는 공물을, 10월 17일 추계 예대제 때 마사카키를 봉납했다. 한편 기시다 총리가 취임 후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참배한 적은 없다. 현직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2013년 12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마지막이었다.
또 자민당과 일본유신회 등 의원으로 구성된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 87명은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집단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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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 정부는 기시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보낸 것을 두고 유감을 표시했다. 외교부는 대변인 명의로 논평을 내고 "정부는 일본의 과거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범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또다시 공물을 봉납하거나 참배를 되풀이한 데 대해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한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책임 있는 인사들이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사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진정한 반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야스쿠니 신사는 1978년에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되자 국제적 비난을 받았는데, 1985년 8월 15일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가 공식 참배하였고,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2013년 12월 26일 아베 신조(2022년 7월 8일 피살) 총리가 신사를 참배하여 국제적으로 무리를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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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일에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區)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2014년 5월 방문 이후 두 번째이다. 야스쿠니 신사 답사는 매우 조심스럽다. 본전의 참배는 절대 금물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참배를 하면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야스쿠니 신사 입구에는 야스쿠니 신사 창립 150주년 표시가 있고, ‘경내 안내도’에는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가 일어와 영어로 적혀 있다. 이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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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의 유래는 메이지 천황의 뜻에 따라 1869년(명치 2년) 6월 29일에 세워진 쇼콘샤(招魂社)이다. 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신령을 위로하고, 그 희생을 후세까지 계승하기 위하여 만든 신사이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이름 지은 '야스쿠니'는 '나라를 안전하게 만든다'는 뜻이며, 야스쿠니 신사는 「조국을 평안하게 한다」,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러면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1867년 10월 14일에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신청하였고 다음 날 천황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대정봉환(大政奉還)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권 인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에도 막부시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정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막부 지지 세력이 동맹하여 1868년 1월 보신전쟁(戊辰戰爭)을 일으키며 교토의 도바, 후시미에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군과 싸웠다. 이후에도 막부 세력 및 도호쿠 지방의 오우에쓰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아이즈번[會津藩]·쇼나이번[庄内藩] 막부군의 저항이 계속되었으나 모두 진압되어 1869년 5월에 내전은 종결되었다.
1869년 6월 29일에 메이지 천황의 명령으로 도쿄에 초혼사가 지어졌다. 그 목적은 보신전쟁 등으로 전사한 정부군 3,588명을 위령(慰靈) · 현창(顯彰)하여 근대적이고 통일된 국가로 거듭나려는 메이지 유신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있었다.
( 참고문헌 )
o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김석근 옮김, 야스쿠니의 일본,일본의 야스쿠니, 산해, 2005
o 동북아역사재단 편, 야스쿠니에 묻는다, 동북아역사재단, 2014
o 편 일본의 전쟁 책임 지로센터 ·박환무 옮김, 야스쿠니 신사의 정치, 동북아 역사 재단, 2011
o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현대송 옮김,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역사비평사, 2005
o 조용래 지음, 천황제 코드, 논형,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