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순천역사기행] 순천옥천서원 (7)–연산군, 「조의제문」을 한구절 한 구절 풀이하다
[김세곤의 순천역사기행] 순천옥천서원 (7)–연산군, 「조의제문」을 한구절 한 구절 풀이하다
- 기자명 김세곤 기자
- 입력 2023.02.05 08:56
1498년 7월 17일에 연산군은 전라도 도사(都事) 정종보에게 "도내에서 간행한 김종직(1431∼1492)의 문집 판본(板本)을 즉시 불태우라"고 명령하였다.
이어서 연산군은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조의제문」을 읽고 직접 풀이했다.
"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 시절에 과거에 합격했고, 성종 때에 이르러서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래도록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고, 끝에는 형조판서까지 이르러 은총이 온 조정에 가득하였다. 그가 병들어 물러가게 되자 성종께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곡(米穀)을 내려주어 말년을 잘 마치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제자 김일손은 사초(史草)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세조를 말함)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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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 10월(1457년)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 밀양의 옛 지명)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를 말함)에게 살해되어 침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심(心)은 진(秦)나라 말기 초나라의 왕 의제(義帝 ?~BC 206)이다. 그는 BC 208년에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이 초(楚)를 다시 세운 뒤에 회왕(懷王)으로 옹립되었다가 BC 206년에 항우(BC 232~202)에 의해 살해되어 침강(郴江)에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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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연산군은 조의제문 본문을 읽고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하였다.
“ (...) 나는 동이족이요. 또 천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 양흔낭탐(羊狠狼貪) 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죽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 칠 아니했는고. (...)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 주자를 말함)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떨리는 마음을 공손히 가라앉히며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제사 지내니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글귀의 조룡은 진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왕을 찾아 얻어서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구절의 왕은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이 진(秦)을 치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김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 단종)에 비유한 것이다.
그 ‘양흔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양흔낭탐은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를 벤 데 비한 것이요.”
양흔낭탐(羊拫狼貪)은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인데 ‘항우의 말과 행동이 거친 것은 양 같으며 탐욕스럽기는 이리 같다’는 의미이다. 관군(冠軍)은 초의 상장군(上將軍) 송의(宋義)를 말한다. BC 207년에 항우는 송의가 제나라와 모의해 초나라를 배신하려 했다는 구실로 제멋대로 죽였다.
연산군의 해석은 이어진다.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 정벌하는 도끼)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노산이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고, 뜻밖에 종직이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두렵고 떨리도다.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2번째 기사)
이러자 참석한 신하들이 의견을 말하였다. 가장 먼저 정문형· 한치례· 이극균·이세좌·노공필·윤민·안호·홍자아·신부·이덕영·김우신·홍석보·노공유·정숙지가 의논드렸다.
이들은 김종직을 대역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고 아뢰었다. 여기에서 이극균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역 이극돈의 동생이고 좌찬성이었다. 노공필은 영의정 노사신의 아들인데 의정부 우참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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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유지는 극형에 처하라고 아뢰었고, 박안성·성현·신준·정숭조·이계동·권건·김제신·이계남·윤탄·김극검·윤은로·이집·김무·김경조·이숙함·이감도 대역부도(大逆不道)하다며 마땅히 극형에 처하라고 아뢰었다. 변종인·박숭질·권경우·채수·오순·안처량·홍흥도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라고 말했다.
이윽고 김종직의 문인인 이인형·표연말이 의견을 말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도 마땅하옵니다."
김종직의 문인 조차도 김종직을 베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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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극규·이창신·최진·민사건·홍한·이균·김계행은 김종직의 범죄는 차마 말로 못하겠으니, 율문에 의하여 논단하라고 아뢰었다.
정성근은 그 흉악함을 헤아리지 못하온즉 마땅히 중현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복선은 역신의 율에 따라 논단하라고 말하였다.
이세영·권주·남궁찬·한형윤·성세순·정광필·김감·이관·이유녕이 의논드렸다. "지금 김종직의 글을 보오니, 말이 너무도 부도(不道)하옵니다. 난역(亂逆)으로 논단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이윽고 사헌부 집의 이유청· 사간원 사간 민수복·유정수·조형·손원로·신복의·안팽수·이창윤·박권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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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김종직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함)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은 나흘 전에 연산군의 실록 열람에 반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김종직이 이미 죽었으므로 부관참시라는 극형은 필요하지 않다는 원칙적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대간의 의견을 주도한 사헌부 집의 이유청(李惟淸 1459~1531)과 사간원 사간 민수복이었다. 이유청은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고손자이다. 이유청은 1486년(성종 17)에 급제하여 1491년에 사헌부 지평이 되고 1493년 사헌부 장령, 1497년부터 사헌부 집의로 일했다.
민수복은 1497년 1월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598년 5월에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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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들은 연산군은 정문형 등이 제시한 의견을 따랐다. 즉 대역(大逆)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어필(御筆)로 사헌부 집의 이유청과 사간원 사간 민수복등의 논의에 표시를 하고, 윤필상 등에게 보이며 전교했다.
"김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논의를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 관원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십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현장에서 이유청 등은 형장 30대를 받았는데, 모두 다른 뜻은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에서 사헌부, 사간원등 삼사가 직접 처벌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화의 주요 처벌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김범 지음,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5, p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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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에 집의 이유청 · 사간 민수복 등은 국문을 당했다. 이들은 "신 등이 망령된 의논을 했을 따름이옵고, 딴 사정은 없사옵니다"라고 공초했다.
연산군은 "대간 등이 스스로 이르기를, ‘임금과 더불어 시비를 다툰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선(善)을 진술하고, 사(邪)를 막아 버리는 것을 공(恭)이라 이른다.’ 하였지만, 큰일을 당하여 그 의논이 이와 같으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이들을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라고 전교했다.
이윽고 윤필상 등이 장 1백 대에 유배 3천리로 할 것을 아뢰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김일손 사건과 함께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