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대한제국 망국사- 38회 고종 황제, 강제 퇴위 당하다.

김세곤 2022. 10. 6. 05:53

대한제국 망국사

- 38회 고종 황제, 강제 퇴위 당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772일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대한제국에 알려지면서 고종 황제의 운명도 마지막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종을 폐위시키기로 작정했다.

 

73일에 이토는 고종을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일본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고 말하면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협박했다. 이러자 고종은 밀사를 파견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경운궁에서 나오자마자 이토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불러 고종을 폐위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이날 밤 총리대신 이완용은 고종을 알현하고 황실을 보존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퇴위가 불가피함을 전언했다. 이러자 고종은 이완용의 행동이 신하의 도리가 아님을 지적하고 크게 역정을 냈다.

 

사흘 후인 76일에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은 고종이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가서 사과하든지 아니면 대한문 앞에서 하세가와 일본 주차군사령관에게 사죄하라고 2시간 동안이나 핍박했다. 송병준은 이토의 지시에 따라 고종 폐위에 앞장 선 것이다. 이러자 고종은 크게 진노했다.

 

77일에 이토는 일본 정부에 대한제국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고종 폐위에 관련 처리요강을 훈시해 달라고 전보를 보냈다.

 

 

이토 통감의 전보를 받은 일본 정부는 710일에 원로대신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712일에 일본 정부는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받아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문서번호 : 141(극비)

발신 : 하야시 외무대신(1907712일 오후 510분 동경 발)

수신 : 이토통감 (712일 오후 930분 경성 착)

제목 : 대한 정책(對韓對策)에 대한 각의 결정 통보 건

 

사이몬지 총리대신 명에 의함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제57호 전보 건에 대해서는 원로 제공(諸公) 및 각료와도 신중히 숙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방침을 결정하고 오늘 재가를 받았음. 일본 정부는 현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함. 그 실행에 대해서는 현지의 상황을 참작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를 통감에 일임할 것.

 

만약 전기(前記) 희망을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때는, 적어도 내각 대신 이하 중요 관헌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에 따라 집행하고, 동시에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중요 관헌에 임명할 것. 본 건은 극히 중요한 문제이므로 외무대신이 한국에 가서 직접 통감에게 설명할 것임. 외무 대신은 15일에 출발할 예정임.”

 

이런 와중에 대한제국 내각은 이완용과 송병준이 서로 앞장서서 고종 황제 폐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718일에 외상 하야시 다다스가 서울에 도착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다급해진 이완용은 716일에 입궐하여 고종에게 (1)

을사조약에 옥새를 찍을 것 (2) 황제 폐하가 일본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할 것 (3) 양위할 것을 상주했다. 하지만 고종은 완강히 거부했다.

 

17일에도 이완용과 송병준은 고종에게 노골적으로 양위를 요구했다. 이러자 고종은 철종의 사위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했다. 박영효는 188412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895년에 귀국하여 내부대신을 하다가 대역죄인에 몰려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076월에 박영효는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하여,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와 접촉하여 특별사면을 받았다. 이런 박영효를 고종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한 것이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와도 친한 박영효가 나서서 자기를 보호해주리라 굳게 믿었다.

 

718일 오후 5시에 고종은 이토를 불러, 자기는 헤이그 밀사 파견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재차 해명했다. 하지만 이토는 그들이 개인 차원에서 행동했다 하여도 한국인이니 임금이 책임져야 한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이어서 고종은 양위와 관련하여 이토에게 물었다. 이토는 이 문제는 일본 천황의 신하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다.

 

718일 오후 8시쯤에 일본 외상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입국 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이완용과 송병준 등은 고종을 알현하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은 가장 강경하고 불손한 행동으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했다. 고종은 단연코 거절하면서 궁내부대신 박영효를 불러오라고 했지만, 박영효는 병을 칭하며 오지 않았다.

 

이 날 밤 상황은 험악했다. 고종은 여차하면 대신들을 살육하려고 시위대 근위병을 궁중으로 불렀고 대신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을 품에 숨기고 들어갔다.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중과 외부의 연락이 가능한 전화선들을 모두 절단했다.

 

이 날의 상황을 황현은 <매천야록>에 적었다.

 

이완용 등은 황태자에게 양위하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이완용은 칼을 빼어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고함 질렀다.

 

이때 폐하를 모시고 있는 무감(武監)과 액례(掖隷 액정서에 딸린 아전)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이완용의 행위를 보고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칼을 빼어 들고 고종의 말 한마디만 기다리며 이완용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참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완용을 흘겨보며 그렇다면 선위를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자 이완용 등은 물러나갔다.

 

(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하, 문학과 지성사, 2005, p 405-406)

 

719일 새벽 5시에 고종은 황태자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러자 황태자는 상소를 올려 대리 청정에 대한 명령을 취소할 것을 아뢰었다. 고종이 사양하지 말라고 하자, 황태자는 재차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고종은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했다.

 

고종의 대리 청정조칙이 내려지자 이완용은 곧바로 황제 대리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의식을 주관하는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스스로 궁내부 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720일 오전 9시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중화전에서 순종 즉위식을 거행했다. 즉위식은 고종과 순종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고 궁궐의 내시가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고종 황제(18521919 재위 1863-1907)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갔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이 즉위했다. (1907719일의 순종실록에는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순종이 즉위식을 올리는 그 시각에 이완용의 집이 불탔다. 반일 단체 동우회 회원들이 이완용의 남대문 앞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홀랑 태워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재도구는 물론 누대에 걸친 조상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 잘못 들인 탓에 우봉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는 박제순이 가장 욕을 많이 먹었는데 2년 후인 고종 퇴위를 계기로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어 민중들의 저주를 받았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가족들을 잡아 죽이자는 군중들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이완용은 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다. 즉위식이 끝나자 이토는 서둘러 이완용을 태우고 남산 통감 관저로 향했다.

 

오고 갈데없는 이완용 가족들은 이날부터 왜성 구락부에 머물렀고, 두 달이 지난 9월에 형 이윤용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그런데 19081월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집도 없이 형에게 얹어 사는 이완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중구 저동에 있는 남녕위 궁을 하사함으로써 이완용은 비로소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고종은 퇴위를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할 만도 한데 그에게 집까지 하사한 것이다. 윤덕한은 이완용 평전에서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황실과 이완용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45-247)

 

한편 일제는 서둘러 일본국 천황의 축하 전보를 보내 고종의 퇴위를 기정 사실화했고, 720일에 순종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각국 영사를 수옥헌(漱玉軒 지금의 중명전)에서 접견하였다.

 

그런데 고종의 퇴위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통곡이 이어지고 수천 명이 모여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폭동 사태가 연출되었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가 습격당하고, 시위군중 일부는 경운궁 대한문 앞 십자로에 수백 명이 꿇어앉아 고종에게 결코 양위하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런 군중 시위를 경찰과 주차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처럼 막강한 물리력을 동원한 일제의 제압으로 퇴위 반대 시위는 점차 수그러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