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14) - 삼도 근왕군, 용인전투에서 어이없게 패하다.

김세곤 2022. 9. 27. 01:46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14) - 삼도 근왕군, 용인전투에서 어이없게 패하다.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15926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이끄는 5만 명의 조선군이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의 왜군에게 어이 없게 패했다.

 

15925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8천 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조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로 돌아와 버렸다. 전라도의 많은 백성들은 이광의 처사에 격분하고 불평하였다. 특히 김천일, 정운룡 등은 이광을 처벌하고 근왕의병으로 나서자고 주장하였다.

 

이광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충청관찰사 윤국형과 경상관찰사 김수도 합세하였는데, 3도의 군사는 전라도 4만 명 이상, 청도 8천 명, 경상도 100여 명으로 모두 5만 명이 넘었다.

 

삼도 근왕군은 행군할 때 무기와 수송을 맡은 우마차가 들판을 뒤덮어 장관을 이루었다. 하지만 관군은 숫자만 많았지 오합지졸이어서 행군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그런데 준비없이 급조된 군대에다가 지휘관들조차 대부분이 지휘 역량이 너무 떨어졌다. 작전 회의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광주목사 권율은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자, 다른 장수들은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진을 쳐야 한다고 반박하는 등 의견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때 왜군 6백여 명이 와기사카 사헤이의 지휘 아래 용인 언저리 북쪽 두문산과 무소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광은 선봉장 이지시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이들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러자 일본군은 조선군의 숫자가 워낙 많아 구원병을 요청하고 서울로 후퇴하려 했다.

 

65일에 백광언 등은 문소산에 있는 왜적에게 총공세를 퍼부어 왜적 10여 명을 베었지만 왜군은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이 날 서울에서 내려온 일본의 구원병 1천 명이 용인 부근에 나타났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본 수군이었다.

 

밤이 되자 왜적은 백광언의 군사가 차츰 해이해졌음을 알고 불시에 숲속에서 나와 일시에 칼을 휘두르니 백광언과 이지시가 달아나면서 죽었다. 이어서 고부 군수 이윤인, 함열 현감 정연 등도 피살되자 나머지 군사들은 기세가 크게 꺾였다.

 

66일 아침 수원 광교산에 진을 친 조선군의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왜군이 갑자기 산골짜기를 따라 기습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자, 충청 병사 신익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에 놀라 가장 먼저 도망갔다. 이러자 5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듯하였다.

 

이광와 윤국형 그리고 김수는 30리 밖에 있었지만 크게 당황하여 군량과 군수품을 모두 버린 채 도주했다.

 

와키자카기(脇坂記)’에는 용인전투 때 거둔 조선군의 수급이 1천 여급, 생포가 2백여 명이라고 적혀있다.

 

5만 명대 1,600명의 용인전투는 이렇게 조선군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났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군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자 서울 수복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고, 조선 군민(軍民)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썼다.

 

당시 순찰사 세 사람은 모두 문인 출신으로 다 같이 병무(兵務)에 익숙하지 않았다. 군사의 수는 비록 많았지만 명령이 제대로 서지 않았으며, 또 험준한 지형만 믿고 제대로 방어 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옛사람이 군사일을 마치 봄나들이 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유성룡 지음 · 이민수 옮김, 징비록, p 102)

 

이 패전책임으로 이광은 파직당한 후 유배를 갔다. 후임 전라관찰사는 78일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광주목사 권율이었다. 충청관찰사 윤국형도 파직되었고 공주목사 허욱이 충청관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