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대한제국 망국사- 35회 고종,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다.

김세곤 2022. 8. 25. 04:07

대한제국 망국사

- 35고종,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고종, 이준에게 밀서를 주다.

 

190511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고종은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미국 정부에 늑약의 부당성을 알렸지만 미국 국무부는 외면했다. 고종은 다시 전 주한미국 공사 알렌에게 로비자금을 주면서 미국 정부가 열강과 공동으로 진상조사를 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정부는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고, 알렌도 로비자금을 반납하고 19062월부터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고종은 독일 등 여러 나라 황제에게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사진 1 고종의 친서

 

이러자 고종은 19076월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했다.

 

1899년에 처음 열린 만국평화 회의는 군비축소와 국제중재재판소 설치 문제를 다루었지만. 당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2차 만국평화회의는 러일전쟁으로 촉발된 군사적 위험을 막기 위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먼저 제안했으며 190595일 포츠머스 조약직후 러시아가 회의를 주관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알게 된 고종은 한국도 정식 초청되도록 러시아에 여러 가지 통로로 로비하였다.

 

이윽고 고종은 평리원 검사 출신 이준(18591907) 비밀리에 불러 밀서를 주면서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고종의 밀서를 휴대한 이준은 1907420일에 서울을 출발했다.

밀서는 전권 위임장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였다.

 

사진 2 이준 집터 (서울시 안국역 1번 출구)

 

그러면 한국 대표를 참석시켜 한국이 권리회복을 얻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 담긴 고종의 친서를 읽어보자.

 

짐은 오늘의 경우가 간난(艱難 힘들고 고생스러움)하여 회고해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현하(現下)의 정세는 깊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터이니 폐하는 우리나라가 무고히 화()를 당하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여 짐의 사절(使節)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형세를 해당 회의에서 설명할 수 있게 하여 만국 공연(公然)의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국권이 회수될 수 있을까 기대합니다. …」

 

이준과 별도로 4월 초에 고종의 특사 헐버트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떠났다.

 

한편 이준은 520일에 북간도에서 달려온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18701917)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 열차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6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이들은 주러시아 한국공사였던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1884?)을 만났다. 23세의 이위종은 영어·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러시아 한국공사관 참서관 출신 직업외교관이었다.

이로써 헤이그 세 특사가 구성되었다. 정사는 이상설, 부사는 이준 · 이위종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헤이그 특사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기 위해 15일간 체류하면서 교섭을 벌였지만 허사였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만주·한국·몽고에 관한 비밀협상이 잘 이루어져 러시아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특사단은 시간만 허비했다.

 

619일에 특사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에 도착하여 공고사(控告詞 성명서)를 인쇄한 다음, 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지 열흘이 지난 625일에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2차 만국평화회의는 44개국 대표 225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7615일에 열려 1018일까지 계속되었다.

 

사진 3 공고사

 

# 헤이그에서의 활동

 

특사들은 도착 즉시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도착 사실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네델란드 신문사 특파원이 628일에 보도함으로써 유럽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진 4 헤이그 세 특사

 

 

629일에 헤이그 특사들은 러시아 수석대표이며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을 체결 당한 사정을 설명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참가시켜 줄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넬리도프는 회의 참가에 대한 결정권이 형식상 초청국인 네덜란드 정부에 있다고 책임 회피하였다. 넬리도프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한국 특사들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하라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러자 헤이그 특사들은 네덜란드 외무성을 방문해 외무대신 후온데스의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후온데스는 각국 정부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하였고, 을사조약에 의해 외교권이 일본에게 위임되어 2년간이나 외국과 단교되어 한국은 독자적인 외교권 행사를 할 수 없으므로 회의 참가 자격이 없다. 또한 만국평화회의는 그런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면담을 거절했다.

 

이후 특사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 청국의 대표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했지만 모두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만난 이는 미국 대표였다. 특사들은 미국 대표를 만나 아래와 같이 호소하였다.

 

“19051117일 일본이 체결한 을사조약은 황제의 동의가 없었고, 무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률과 관습을 무시해서 행동한 사실 등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이처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서 황제의 특사로 파견되었는데도 일본에 의해 회의 참석이 어려우니 호의적 배려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미국 대표는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도와주지는 못했다.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는 것이 무산되자, 특사들은 만국 평화회의 44개국 대표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고사와 명함을 돌리면서 일본의 불법행위와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사진 5 헤이그 특사의 일정

 

특사들의 이런 행동에 일본 측은 비상이 걸렸다. 일본 대표는 특사의 활동을 일본 외무성에 보고했고, 72일에 일본 외무대신은 이토 통감에게 전보를 보냈다. 전문을 읽어보자

 

“ (4) 제목 : 헤이그 도착 한국인 3명이 평화회의 각국 위원에게 보낸 문서에 관한 건

 

내전(來電) 122

발신 일본 외무대신

수신 이토 통감

 

윌리엄 스테트가 이곳에서 발행한 쿠리어 드 라 컨퍼런스는 오늘 신문지상에 한국 전 부총리외 2명을 627일자로 평화회의 위원에 보냈다는 서면을 실었음.

 

서면에는 우선 그 한국인을 평화회의 위원으로 한국 황제께서 파견한 자라는 것을 기재함.

 

이어서 일본이 한국 황제의 뜻을 배반하고, 병력으로 한국의 법규 관례를 유린하고 동시에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한 결과 자신들이 한국 황제가 파견한 위원임에도 불구하고 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없음은 유감이라는 점, 본 서면에서 일본의 비행(非行) 개략을 기록한 문서를 첨부한 점, 외국 위원들이 더욱 상세한 사항을 알기를 바라거나 한국 황제로부터 부여된 전권을 확인하기를 원한다면 그 요점에 대해 대답하겠다고 말하며, 자신들이 평화회의에 참여하여 일본의 행위를 폭로할 수 있도록 협력해줄 것을 요구하였음.

 

이상 3명은 전 부총리 이상설, 전 고등법원 예심판사 이준 및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서기관 이위종이라고 함. 또 그 서면에 첨부된 내용문서는 아직 입수하지 못했음.”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 통감부 문서, 통감부 문서 5, 1. 해아밀사건 및 한일협약체결)

 

전보를 받은 통감 이토는 화가 치밀어 즉시 고종에게 달려가 항의하였다. 대한제국은 그야말로 폭풍 전야였다.

 

이토 : 폐하는 어찌하여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할 수 있습니까?

고종 : 그들은 내가 파견하지 않았소.

이토 : 폐하의 신임장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입니까?

고종 : 아마 위조 했을 것이요

 

이러자 이토는 일본에 전보를 보내 헤이그 밀사는 황제의 공식 사절이 아니다.’라고 알렸다. (이상각 지음, 이경 고종황제, 추수밭, 2008, p 307)

 

일본 외무성은 헤이그 일본 대표 츠즈키 케이로쿠에게 특사들이 휴대한 고종 신임장과 친서가 위조임을 알렸고, 츠즈키는 각국 대표와 언론에 이를 선전하였다.

 

이렇게 일본은 헤이그와 도쿄 그리고 서울 사이의 3각 통신망을 구축하여 헤이그 특사의 동향을 파악하고 활동을 방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