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다시 보기 (1)-(2)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 1회 임진왜란, 동아시아판 세계대전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한번 그 역사에 얽매이게 된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기념관
2022년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430년이 되는 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 · 중 · 일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 없이 2백 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1592년 4월 13일에 명나라를 친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었지만, 1592년 7월부터 명나라가 참전함으로써 임진왜란은 조선·명나라와 일본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은 한때 30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싸운 유례가 없는 국제전쟁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보는 한·중·일의 시각은 서로 다르다. 전쟁에 대한 명칭부터 각기 다르다. 우리가 오늘날 쓰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임진년에 왜인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난동’이라는 의미이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정유년에 왜인들이 다시 일으킨 난동’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무고하게 쳐들어와 죽이고 잡아가고 약탈하고 불지르며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일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다분히 반영된 용어이다. 참고로 북한은 임진왜란을 ‘임진조국 전쟁’이라 부른다.
이윽고 일본은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라 부른다. ‘분로쿠’는 1592년부터 1595년까지, ‘게이초’는 1596년부터 1614년까지 일본 천황이 사용한 연호다. 따라서 ‘문록경장의 역’은 ‘문록경장 시대의 전쟁’이라는 일견 중립적인 용어인데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이후부터 사용했다 한다.
일본은 19세기까지는 임진왜란을 ‘조선 정벌’이라 불렀다. ‘조선을 손봐주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는 조선정벌은 조선에 대한 멸시와 우월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한편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이 부각되자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활되었고 교토에 풍국신사가 세워졌다. 지금도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에는 임진왜란이 영어로 ‘Korean Campaign’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임진왜란을 코리언 캠페인으로 영역한 것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은폐하려는 꼼수이다.
한편 중국은 임진왜란을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만력은 임진왜란시 명나라 황제의 연호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항왜원조(降倭援朝)’를 더 선호한다. ‘일본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왔다’는 이 용어에는 은연중에 ‘은혜를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중국은 1950년에 중공군이 참전했던 6.25 전쟁을 ‘항미원조(降美援朝)’라 부른다. 35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항왜와 항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대하여 한국을 도왔다는 역사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이는 한국이 중국의 종속국이라는 의식과 한반도에 대한 개입 의지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3국이 ‘동아시아 7년 전쟁’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호응이 별로 없다.
한편 19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는 ‘임진왜란 삼대첩(三大捷) 즉 한산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을 공부하면서 민족의 자존심을 배웠다. 더구나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을 통해 이순신에 대한 기억은 ‘성웅(聖雄) 이순신’으로 각인되었고, 지금도 한국인들은 임진왜란을 언급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순신과 거북선을 떠올린다.
임진왜란을 다시 본다. (2) - 임진왜란, 예고된 전쟁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임진왜란(1592∼1508) 7년 전쟁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짐을 알았지만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1590년 2월 28일에 선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헌부례(獻俘禮 : 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거행했다. 1587년 손죽도 사건을 일으켰던 왜구 3명과 길잡이를 한 반역자 사을화동(沙乙火同)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잡아와 선조에게 바친 것이다. 헌부례가 끝나자 이들은 성밖에서 참수되었다.
그런데 대마도주는 ‘나는 새도 잡는다’는 조총(鳥銃)을 바쳤다. 선조는 조총을 쳐다보지도 않고 군기시(軍器寺 병참본부)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1543년에 일본 규슈 근처의 종자도에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이 종자도 영주에게 조총을 바쳤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수 양성에 진력했다.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최강의 기마군단 다케다 가쓰요리를 이겼다.
선조는 1590년 3월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일본에서 귀국한 조선통신사를 만났다. 이들의 대화이다.
정사 황윤길(서인):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
부사 김성일(동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선조: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
황윤길: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김성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김성일에게 물었다.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김성일은 답변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로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는 동인이 집권했기에 대세는 김성일에게 기울었고, 동인은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공격했다. 선조는 ‘전쟁이 없다’고 결론내리고 국론(國論)으로 정했다.
불행하게도 1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김성일은 ‘전쟁은 없다.’고 단언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런 오류는 김성일(동인)의 잘못된 일본 인식에서 비롯된다. 동인들은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로 깔보았다. 1543년에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전투의 혁신을 이룬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을 하찮게 봤다.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였다. 부산포에 들어온 지 15일만인 4월 28일에 왜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을 조총으로 궤멸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3일전인 4월1일에 류성룡은 신립에게 조총을 지닌 왜적을 경계했다.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조총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4월 30일 새벽에 선조는 칠흑 같은 비를 맞으며 한양을 떠났다. 난민(亂民)들은 경복궁·창덕궁에 불을 질렀고 장예원과 형조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5월 7일에 선조는 평양에 들어갔다. 조선군은 연전연패였다. 6월 1일에 왜군은 평양으로 오고 있었다. 2일에 선조는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피난 가자는 의견과 평양 사수론이 대립했다.
이 소식에 백성들이 도성을 떠나자 선조는 백성들에게 사수(死守) 의지를 밝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지킬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6월 8일에 왜군이 대동강에 진을 치자 선조는 피난 준비를 했다. 6월 10일에 중전(中殿)이 평양성을 나가자, 평양 백성들이 몽둥이로 궁비(宮婢)를 쳐서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6월 11일에 도망치듯 평양을 빠져나간 선조는 6월 14일에 국정 권한을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자신은 요동으로 가겠다는 외교문서를 명나라에 보냈다. 6월 22일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신하들에게 요동행을 독촉했다. 이러자 류성룡과 윤근수가 극력 말렸다. 다행히 6월 27일에 명나라에 다녀온 이덕형이 명나라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자 선조의 망명 소동은 잠잠해졌다.
의주에서 선조는 아래 시를 지었다.
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도다
조정 신하들은 이 날 이후에도
서인이니 동인이니 나뉘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당쟁을 누가 조장하였는가? 임금 자신에 대한 반성은 없고 오직 이 모든 것이 당파 싸움 때문이라고 떠넘기는 선조. 참으로 한심한 국가 최고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