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역사 이야기

논산 파평윤씨 유적 답사

김세곤 2022. 6. 23. 18:52

논산 파평윤씨 유적 답사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5월 하순에 충남 논산의 파평윤씨 유적을 답사했다. 윤여갑 씨의 안내로 맨 먼저 간 곳은 종학당(宗學堂)이다. 종학당은 파평윤씨 문중 서당으로 1627년에 인평대군 사부 윤순거(尹舜擧)가 세웠다.

 

이어서 윤황 고택과 묘소를 찾았다. 대사간 윤황은 우계 성혼에게 배웠는데 성혼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8형제(적출 5, 서출 3명 속칭 팔거)를 낳았다. 창녕성씨 부인이 낳은 다섯 아들이 훈거, 순거, 상거, 문거, 선거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다.

 

다음은 유봉영당(酉峰影堂)이다. 윤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데, 원래 윤증이 살았던 초가집이었다.

 

윤증 13세 종손과 점심을 한 후에 명재고택(明齋故宅)을 답사했다. 명재고택은 윤증(16291714)이 살아계신 1709년에 맏아들 윤행교와 손자 윤동원에 의해 지어졌는데, 정작 윤증은 유봉 초가에서 살았다.

 

파평윤씨 병사(丙舍)묘역도 들렀다. 이곳엔 입향조 윤돈(15191577)과 윤돈의 장인 류연, 윤돈의 아들 윤창세, 그리고 윤창세의 장남 윤수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3남 윤전(15751637), 윤수의 양자 윤순거, 윤순거의 차남 윤진 등 11기의 묘소와 윤순거·윤전·윤진의 신도비 등이 있다.

 

파평윤씨가 논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38년경에 윤돈이 류연의 사위가 되어 처향(妻鄕)인 논산으로 이거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윤돈의 아들 윤창세가 윤수, 윤황, 윤전, 윤흡, 윤희 다섯 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노종오방파(魯宗五房派)라 불렸다.

 

필자는 윤순거 묘소에 참배하고 신도비를 보았다. 비문은 조카 윤증이 지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에서 명재유고를 찾았다.

 

인상 깊은 것은 3가지 행적이다. 윤순거는 의령현감 때 남효온의 사당을 건립하였고, 1655년 금구현령 시절엔 스승 강항을 현창했다. 윤황(15711639)1609년부터 영광군수를 하였는데,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가 귀향한 강항(15671618)과 친했다. 강항 역시 성혼의 문인이었다. 윤황은 아들 윤훈거와 윤순거(1596~1668)를 강항에게 수학케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윤순거는 강항 행장(行狀)을 지었고, ‘수은집을 편찬했다. 또한 강항의 포로 생활 실기(實記) ‘건거록(巾車錄)’간양록(看羊錄)’으로 이름을 고치고 자신이 발문(跋文)을 써 1656년에 간행하였다. 참고로 윤순거는 영광군 내산서원에 강항과 함께 배향되었고, 윤순거(16101669)는 영광 관사에서 태어났다. 또한 윤순거는 1660년 영월군수 시절에 노릉지(魯陵志)’를 편찬했다. ‘노릉지를 읽은 숙종은 1681년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추봉했다.

 

다음에 간 곳은 윤증 묘소이다. 공주시 계룡면에 홀로 계신다. 묘비엔 유명조선징사파평윤공휘증지묘(...徵士..)’라고 적혀 있다. 징사(徵士)는 나라의 부름을 받은 선비라는 뜻이다. 윤증은 대사헌·우의정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백의정승이라 불렀다.

 

묘소 안내문에는 아버지 비문 사건을 거치면서 송시열과 멀어지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는데, 윤증이 부탁한 부친 묘갈명을 스승 송시열(16071689)이 무성의하게 짓자 결별했다.

 

마지막 답사는 노강서원이다. 1672년에 건립된 노강서원은 윤황을 주벽으로 윤선거와 윤문거 그리고 윤증을 추배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누구의 후손인가? 윤황의 4남 윤문거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