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62)- 아관파천(俄館播遷)
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62)
- 아관파천(俄館播遷)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896년 2월 11일 오전 7시 고종과 왕세자가 궁녀로 변장하여 엄상궁 (영친왕의 친모)과 김상궁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을 빠져나왔다. 이들은 곧장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이었다.
아관파천은 고종과 두 상궁, 이범진과 이완용 등 정동파와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와 베베르의 합작품이었다.
1895년 11월부터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親衛隊) 병력까지 동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울과 궁궐 경비에 공백이 생겼다. 이 기회를 틈타 상해에 머물던 이범진이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그는 러시아 공사관에 은신하면서 고종의 밀사인 엄상궁과 수시로 연락을 취했다.
1896년 1월 8일에 주일러시아 공사관 서기관 스페이어가 멕시코 공사로 발령받은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로 서울에 부임했다. 그런데 러시아 정부는 베베르의 멕시코 공사 부임을 일단 중지하고 서울에 계속 머무르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3월 1일에 스페이어가 주일 공사 대리, 베베르가 다시 주한 공사로 발령받을 때까지 거의 두 달간 함께 근무했다.
1월 12일에 스페이어 공사는 신임장을 제출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의 불안한 처지를 하소연하는 비밀 메모를 스페이어의 주머니에 몰래 집어넣었다.
이에 두 공사는 러시아가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면서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하지만 러시아 외무성은 거절했다.
2월 2일에 고종은 ‘나와 세자는 언제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싶다.’는 친서를 엄상궁을 통해 이범진에게 보냈다. 이범진은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두 러시아 공사를 설득했다.
며칠 후 두 공사는 러시아 정부에 고종의 처지를 보고했다. 이러자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군함의 제물포 입항을 명령했다. 2월 10일에 러시아 공사는 러시아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에서 수병 100여 명을 포 1문과 함께 서울로 불러들여 공사관 주변을 경비하게 했다.
이 때 고종은 주한미국공사 알렌에게 파천 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자, 알렌도 물밑에서 도왔다.
이범진 등 정동파는 수시로 대궐 밖을 출입했던 엄상궁과 김상궁의 가마를 타고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경복궁의 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궁녀의 가마는 관례적으로 검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2월 11일 아침에 아관파천한 고종은 맨 먼저 경무관 안환에게 김홍집과 정병하 · 조희연 등 역적들을 체포하라는 명령했다. 이리하여 전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는 경찰에 체포되어 광화문 경무청 앞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피신하였으나 2월 17일에 용인에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로 종신 유배됐다. 한편 조희연, 유길준, 장박, 우범선, 이두황, 권영진, 이범래, 이진호 등은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읽어보자
“이때 세상에서는 김윤식과 어윤중을 청당(淸黨), 김홍집과 유길준은 왜당(倭黨), 이범진과 이윤용은 친러당으로 지목하였고, 이 3당이 갈아들면서 나라 꼴은 점점 말이 아니게 되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나기 전에 고종은 갑오개혁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함께 러시아의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러시아인들도 조선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엿보았다.”
아관파천은 일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는 “임금을 빼앗겼으니 이제 만사는 끝장이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2월 11일에 고종은 미리 준비한 조칙을 내렸다.
"8월의 변고는 만고(萬古)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붕서(崩逝)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詔勅)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다행히 천벌이 내려 우두머리(김홍집과 정병하를 말함)가 처단당한 결과 나라의 예법이 겨우 거행되고 나라의 체면이 조금 서게 되었다.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 을미년 8월 22일 조칙(민왕후를 서인으로 강등시킨 조칙)과 10월 10일 조칙(민왕후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킨 조칙)은 모두 역적 무리들이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 (고종실록 1896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