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33)-(34) 김시습과 서거정의 인연
순례자의 노래 (33)
- 김시습, 남효온에게 답시를 보내다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보낸 「추강의 시에 화운하여」 시 4수중 3수와 4수를 계속하여 읽어보자.
3수
듣건대 그대가 근력을 수고롭혀 聞子勞筋力
장래에 큰일을 하려한다 들었소만, 方將大有爲
부디 운각의 책들을 모두 읽어 須窮芸閣袠
부디 계수나무 꽃 계절을 저버리지 마시게. 莫負桂香期
김시습은 남효온에게 운각의 책 즉 교서관에서 간행하는 책들을 모두 읽어 과거에 응시하라고 조언한다.
계향은 계수나무 꽃향기가 풍기는 계절, 즉 과거 보는 시절이란 뜻이다.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계수나무 가지를 꺾는다고 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문득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생각한다. 그도 올림픽에 우승하여 월계관을 썼다.
고기잡이 배는 낙조에 흔들리고 漁艇搖殘照
갈매기 나는 파도는 넘실대누나 鷗波漾冸凘
찬방(요사)에는 교분 깊은 벗들이요 贊房交契友
방에는 지란(지초와 난초)이 가득하네 滿室是蘭芝
소위 지란지교(芝蘭之交)이다. 「지초(芝草)와 난초(蘭草) 같은 향기(香氣)로운 사귐」이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고상(高尙)한 교제(交際)」를 이르는 말.
출전 명심보감(明心寶鑑)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교우(交友)〉편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착한 사람과 같이 살면 향기(香氣)로운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있는 방안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도록 그 냄새를 알지 못하나 곧 더불어 그 향기(香氣)가 동화(同化)된다…」라는 구절(句節)에서 유래(由來)된 말이다.
4수
세상 사람 어찌나 사리에 어두운지 世人何貿貿
비둘기가 대붕을 비웃듯 하는구려 斥鷃笑南爲
《莊子 逍遙遊》에 나온다.
척안(斥鷃)이라는 작은 비둘기는 하늘 높이 구만리나 날아오른 뒤에 남명(南冥)으로 옮겨가는 대붕(大鵬)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저 새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 몇 길도 오르지 못하고 내려와서 쑥대 사이를 날아다니매 이 또한 지극히 즐겁거늘, 저 새는 또 어디로 가는가.”
행업을 만약 먼저 갈고닦는다면 行業如先勵
공명은 저절로 기약함이 있으리라 功名自有期
양춘이 화창하여 땅기운 떠오르고 陽和浮土脈
햇볕이 따뜻하여 봄물이 불어나오 日暖泛春澌
영주(瀛洲)에 오름은 지척으로 가까우니 憑余莫討芝
나에게 의지하여 지초랑 찾지 마소 憑余莫討芝
등영주(登瀛洲 전설상 신선이 산다는 영주산에 오름)란 공명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김시습은 자신처럼 지초가 되지 말라고 타이른다. 공명을 꼭 이루라고 당부한다.
이어서 김시습은 시 말미에 별지를 붙였다.
“선생이 최근 두소릉(杜少陵)의 시를 읽고 있구려. 부쳐준 시구 속에 두보(杜甫 712~770)의 성벽(性癖)이 나타나 있으니 말이오.
내가 《황정내경경》을 보관하여 돌려주지 않은 것은, 오랫동안 빌려 보고 돌려보내지 않아 선생으로 하여금 애타게 기다리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이 지난해에 물건을 보내며 함께 보낸 편지가 책 상자 속에 뚜렷이 남아 있으니, 내가 어찌 잊었겠습니까?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었어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하신 꾸짖음이 우레처럼 무섭구려. 언제 만나서 무릎 웅크리고 크게 껄껄 웃어 봅시다.
두보는 “나의 성벽은 아름다운 시구를 몹시 좋아하여, 시어(詩語)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노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라고 말했다.
두보는 당나라 현종 때 일어난 안록산의 난을 겪으며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을 시로 표출했다. 전란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그린 <삼리(三吏) ;신안리(新安吏), 석호리, 동관리>와 <삼별(三別); 신혼별(新婚别), 수노별, 무가별>시가 그것이다.
두보의 시 <춘망(春望)>은 절창이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 안에 봄이 오니 초목만 무성하구나.
시국을 생각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게 한다.
그는 글자 하나하나를 다듬고 또 다듬어 구절을 응축하고 대구와 억양을 공들여 맞춤으로써 시의 율격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후세 사람들은 두보를 ‘시성(詩聖)’, 그의 시를 ‘시사(詩史)’라고 일컬었다.
한편 김시습이 이 당시에 쓴 7언 절구 「수락산 성전암」에도 ‘황정경’이 나온다.
산속에 나무 찍는 소리 들리면
숨었던 새들 나와 한낮을 즐기네
골짜기 노인 바둑 두고 간 뒤
나무 그늘로 책상 옮겨 황정경을 읽노라.
순례자의 노래 (34)
- 김시습과 서거정의 인연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년에 수락산에 머문 김시습은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안씨와 결혼하였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김시습에게 벼슬을 하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는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의연하게 지냈다.
김시습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전부 받아주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나무토막이나 돌멩이로 때려 보기도 하고, 활을 겨누어 쏘는 시늉을 하여 제자들을 시험하였다.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단옷 입은 고관 자제에게도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켰다. 이러자 끝까지 공부하는 자가 드물었다.
한편 김시습은 도성에선 매양 향교동(鄕校洞) 남의 집에 붙어 있었다. 대신(大臣)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찾아오면 그는 예(禮)를 갖추지 않고, 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하여 벽에 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얘기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모가 서대감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소홀히 하는 것이 저와 같으니, 뒤에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며칠 뒤에 서거정은 다시 찾아와 김시습을 만났다.
이처럼 서거정과 김시습은 우의가 돈독하였다. 서거정은 그를 국사(國士)로 칭찬하였다. 한번은 서거정이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정에 들어가는데, 마침 김시습이 남루한 옷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로 엮은 삿갓)를 쓴 채로 그 길을 지나다가 그 행차의 앞길을 범하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 편안한가.” 하였다.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수레를 멈추어 이야기하니, 길 가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에 조정의 벼슬아치 가운데 어떤 이가 서거정에게 김시습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자, 서거정은 머리를 저으며, “그만두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이 사람을 벌하면 백대(百代)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에 누(累)가 되리라.” 하였다.
1462년부터 경주 금오산(金鰲山) 중턱에 있는 용장사에 머문 김시습은 1465년(세조 11년) 4월 7일에 서울 원각사(圓覺寺) 낙성법회에 참석했다. 낙성법회가 있던 날 김시습은 뒷간에 빠졌다. 승려들이 미쳤다고 여겨 그를 내쫓았다.
이때 김시습은 서거정을 찾아가 1465년 초에 지은 경주 남산 금오정사의 제시(題詩)를 부탁하였다. 서거정은 1460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칭찬을 받을 정도로 시문에 뛰어났다.
서거정은 서문과 함께 ‘정사경취의 총론’, 춘·하·추·동, ‘해후했다가 이별하는 뜻을 적음’등 6수의 시를 지어주었다. 이 시는 서거정의 문집인 『사가집』 제12권에 실려 있다.
그러면 서문을 읽어보자
내가 잠상인(岑上人)을 일찍부터 알았지만,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지금 20여 년이 되었는데,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잠(岑)이 계림(鷄林)의 남산(南山)에 터를 잡아서 두어 칸의 정사(精舍)를 짓고 좌우로 서책을 쟁여 두고 그 사이에서 배회하며 읊조리니, 산중의 사계절의 맛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잠은 장차 여기에서 늙고 여기에서 입적하려고 합니다. 일전에 천 리 밖으로 유람을 나와서 서울에 다다랐는데, 내일이면 지팡이를 짚고 돌아가야 하니, 바라건대 선생께서 한 말씀을 주시어 나의 정사를 꾸며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는 오랜 병치레 끝에 붓을 놓고 읊조림을 멈춘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그의 부탁을 어기기가 어려워 붓을 달려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써서 떠나는 행차에 주는 바이다.
정사(精舍)의 경취(景趣) 총괄
어느 해에 황금 털어서 정사(精舍)를 열었는고 何年精舍側金開
만 리 밖 강산들이 좌석 앞에 들어오겠네 萬里江山入座來
오극엔 하늘 나직해라 한해와 연하였고 鼇極天低連瀚海
계림엔 아침 해 돋아 봉래와 근접했지 鷄林日出近蓬萊
반월성 머리엔 노란 단풍잎 떨어지고 半月城頭黃葉落
첨성대 아래엔 흰 구름 겹겹 쌓였으리 瞻星臺下白雲堆
상인(김시습)은 천지간의 독특한 안목 갖췄기에 上人一隻乾坤眼
동해를 작은 술잔처럼 앉아서 내려다 볼 테지 坐瞰東溟小似杯
『불국기(佛國記)』에 의하면, 인도의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일찍이 세존을 매우 존경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건립하여 세존이 그곳에 내림(來臨)하게 하려고 하였다. 당시에 기다태자(祇多太子)가 큰 원지(園地)가 있었다. 수달 장자가 태자에게 그 원지를 사겠다고 청하자, 태자가 농담으로 황금(黃金)을 원지에 가득 깔면 팔겠다고 하니, 장자가 즉시 자기가 가진 황금을 몽땅 털어 원지에 가득 깔았다. 태자는 크게 감동하여 즉시 원지에 정사를 지어서 세존이 그곳에 거주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