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후손들

순례자의 노래 (23)- 김시습과 남효온의 만남

김세곤 2022. 3. 4. 09:38

순례자의 노래 (23)

- 김시습과 남효온의 만남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13월에 김일손은 남효온과 같이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관동으로 떠나는 김시습(14351493)을 전송했다. 김일손은 김시습을 전송하는 시 2수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김시습과 남효온의 관계를 지란지교(芝蘭之交)로 표현했다.

 

그러면 김시습과 남효온은 언제 처음 만났을까? 이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남효온이 소릉 복위를 상소한 1478년 전에 만났다면 김시습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시습이 19세 연하인 남효온에게 추강으로 존칭을 쓰는 것을 보면, 이들은 남효온이 진사가 된 1480년 이후에 만난 듯하다.

 

1480(성종 11)에 남효온은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대과는 포기했다. 꿈에 증조모가 나타나 합격이 어렵겠다고 말했다 한다. 남효온은 추강냉화에 이렇게 적었다.

 

217일에 증조모가 내 꿈에 나타났다. 내가 묻기를 제가 급제하겠습니까?”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묻자 너는 급제하기 어려울 것이다.”하더니, 조금 있다가 나에게 이르기를 금년 5월에 네가 분명 급제할 것이다. 지은 글이 반드시 여러 선비 중에 으뜸일 것이지만, 원수진 자가 시관(試官)이 된다면 반드시 너의 글을 빼내어 낙제(落第)에 둘 것이니, 이것이 네가 급제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지신명이 위에서 굽어보시고 곁에서 질정(質正)하시니, 비록 원수진 사람이 있을지라도 어찌 사사로운 뜻을 그 사이에 부릴 수 있겠습니까.”하니, 증조모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1480년이면 김시습이 수락산(水落山)에서 10여 년 정도 기거하고 있던 때였다.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서 머물다 1471(성종 2) 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1472년 가을부터 수락산 노원 지역, 지금의 노원구 상계동에서 터를 잡은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직접 흙을 만져 농사도 지었다. 그러면서 도성을 오가며 서거정 등 지인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김시습은 수락산 동쪽 봉우리 만장봉(萬丈峰)근처로 이사했다. 그는 이 봉우리를 동봉(東峰)이라 부르고 동봉(東峰)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1682(숙종 8)년에 이희조(16551724)는 수락산에서 노닐고 수락산에서 노닌 기록을 지었는데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수락산은 서울 동쪽 교외 30리 바깥에 있다. 산 남북에 모두 물과 바위가 있다. 그 가운데 옥류봉이라는 곳이 가장 빼어나다. 옥류동은 매월당 김시습이 이름 붙인 것이다. 흰 바위와 은비 폭포가 있어서 이를 마주하면 시원해져 정신을 잃을 정도다. 가다가 산 중턱에 이르니 또 윗 폭포가 있어 이름이 금류(金流)라고 하는데, 더욱 기이하고 장대하여 볼만하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에 매월당 김시습의 옛터가 남아 있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2003, p 314-315)

 

한편 율곡 이이가 1582년에 지은 김시습전에는 1481년에 김시습은 환속하여 안씨에게 장가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화(成化) 17(1481,성종 12)에 김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 그리고는 안씨(安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을 이루었다. 벼슬을 하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으나 시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의연하게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기를 예전대로 하였다. 달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을 외우고, 외우고 나서는 반드시 통곡하였다. 어떤 때에는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서 굽은 것을 곧다고 궤변(詭辯)을 늘어놓고는, 승소(勝訴)하여 판결문이 나오면 크게 웃고는 찢어 버렸다.

 

그는 망나니, 장바닥 아이들과 어울려 거리를 쏘다니다 술에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이 저잣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이놈아, 그만두어라.”라고 소리쳤다.

 

정창손은 못들은 체하고 지나갔지만, 이 때문에 모두 그를 위태롭게 여겨 절교(絶交)하였다. 그러나 종실(宗室)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 몇 사람들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남효온이 김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이 답하기를, “()구멍으로 하늘 보기라.”(소견이 좁다는 뜻이다) 하였다. 효온이 다시 묻기를, “동봉(東峰)의 식견은 어떠한가?”하니, 시습이 답하기를, “넓은 뜰에서 하늘 보기지.”(소견은 높지만 행위가 따르지 못한다는 뜻이다)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내가 죽으니,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중[] 머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