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3년 (15)-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 · 우익의 대립
해방정국 3년 (15)
-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 · 우익의 대립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5년 12월 말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주도한 가운데, 좌익진영은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하면서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6년 1월1일까지만 해도 조선인민공화국은 통일정부 수립방안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고 조선공산당도 ‘신탁통치문제의 해결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으로’라는 제하에 신탁통치 반대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응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은 광범한 반탁운동을 전개했고 상당수 공산주의자들도 동조했다. 그러나 소련이 ‘삼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는 지시를 내리자 김일성은 찬탁(贊託)으로 돌아섰고, 조만식은 1월 5일에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했다.
1946년 1월 2일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반탁 주장을 철회하고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신탁 통치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소련의 지시를 받은 좌익은 신탁통치가 단순한 원조를 의미하는 후견제이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1월 3일에 신탁통치 반대 서울시민 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다. 1월 2일에 공산당원들은 ‘신탁통치 결사 반대’라는 문구를 플래카드에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부에서 찬탁 지령이 떨어졌다.
1월 3일 오후 1시 서울 운동장에서 개최된 '신탁통치 반대 시민대회'는 갑자기 '찬탁'으로 바뀌었다. 이러자 신탁통치 반대를 하러 나온 시민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대회 이름부터 ‘민족통일 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로 바뀐 데다가 ‘신탁통치 절대 반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나온 시민들이 주최측과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주최 측은 원래 예정된 신탁통치 반대 연설 대신 3상 회의 취지 설명회를 진행했고, 주최 측이 동원한 공산당원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절대지지’, ‘인민공화국 사수’, ‘김구와 이승만 타도’, ‘철시파업 즉시 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주도했다. 그러자 신탁통치 반대를 위해 참가했던 많은 시민들이 욕설을 하면서 흩어졌다.
“신탁 통치 반대 시민대회는 최초의 소집 취지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걸어서 모스크바 삼상 회의 절대 지지를 표명하여 신탁통치 반대를 반대한다는 등을 결의하고 오후 2시 반부터 각 단체는 반탁반대(反託反對)의 시가 행진을 하였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4일 자)
이러자 경악한 우익은 조선공산당의 찬탁은 ‘민족을 배신한 반역행위’라고 즉시 성토했다.
1월 5일에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10일 후인 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박헌영이 뉴욕타임즈 특파원 리차드 존스턴에게 자신은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한국은 장래에 소련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방송했다.
동아일보는 이 내용을 <조선을 소련 속국으로 –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씨 희망>이라는 표제를 달아 크게 보도했다.
이날 한민당은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박헌영의 발언은 “조선의 독립을 말살하고 소련의 노예화를 감수하는 매국적 행위”라고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박헌영을 타도하라“는 전단을 유포시켰다.
한편 1월 7일에 우익을 대표하는 학생들의 총연합체로서 ”반탁 전국 학생연맹“이 결성되어 위원장에 24세 청년 이철승이 선출되었다.
이 날 학생들은 서울운동장에서 1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반탁 시위 대회를 열고 “우리는 오직 조선사람이라는 자각으로 신탁을 반대하며 즉각적인 자주 독립을 요구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월 9일에 좌익을 대표하는 학생들은 “재경학생행동통일촉성회(학통)’을 결성하고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의 길을 앞당기기 위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시위에 들어갔다.
1월 18일에 반탁과 찬탁 학생들은 서대문 경교장 근처에서 충돌했다. 남녀 학생 40여 명이 부상당하는 첫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이제 남한에서의 신탁통치 문제는 좌·우익의 대립이었다. 우익은 좌익에게 ‘찬탁 = 친소’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반탁은 애국이며 찬탁은 매국’이라는 등식이 굳어졌다. 반탁의 상징은 김구였고 찬탁의 상징은 박헌영이었다. 이들에게 남은 건 혈투뿐이었다. 친일청산은 뒷전이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1권, 2004, p 193-203)
김기협 지음, 해방일기 2, 2011, p 349-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