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의 후손들

순례자의 노래 (16)- 남효온의 상소 (1)- 18회

김세곤 2022. 2. 17. 09:25

순례자의 노래 (16)

- 남효온의 상소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심원이 상소한 일주일 후인 1478(성종 9) 415일에 또 한 통의 상소가 올라왔다. 성균관 유생 남효온(14541492)의 상소였다.

 

"신은 초야(草野)의 백성으로서 성대(聖代)를 만나 태평의 덕화(德化)를 입으니, 개나 말이 그 주인을 사랑하는 정성으로써 강개(慷慨)하여 배운 바를 말하고자 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달 초하루에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자 하교(下敎)하였으니, 아아! 상림(桑林)의 육책(六責)과 주()나라 선왕(宣王)이 자신을 반성하고 덕행을 가다듬은 것이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마음 쓰심이 이와 같으니 재이(災異)가 변하여 상서가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정치의 요도(要道)를 묻고 어진 이를 구하하시고,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고리 굴리듯 하시고 전대(前代)에 거행하지 못한 예()를 거행하시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조서(詔書)와 농사를 권려하는 글을 잇달아 내렸으니 참으로 성군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재이 또한 많습니까? 경인년(1470년 성종 원년) 여름에는 적지천리(赤地千里)이었고, 임진년(1472)에는 가을에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으며, 정유년(1477)에는 산이 무너지고 가물며 황충(蝗蟲)이 있었으며, 무술년(1478)에는 지진과 흙비가 있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하늘이 성상을 사랑하여 그 덕을 닦게 하는 것이므로, 성주(聖主)는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는 것이 마땅할 줄로 압니다.

신은 어리석고 고루하여 재이(災異)가 일어난 이유와 재이를 막을 방법은 알지 못하나, 귀와 눈으로 보고 들은 바대로 우선 진술합니다.

 

첫째, 혼인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시경(詩經)에서 관저(關雎)를 첫머리로 한 것과 역경(易經)에 건(()을 바탕으로 한 것은 부부(夫婦)의 도를 바르게 한 것입니다. 남자가 성장하면 아내를 두기를 원하고 여자가 성장하면 시집가기를 원하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도리입니다. (...) 그런데 지금은 혼인하는 즈음에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사족(士族)의 자녀가 혼인할 시기를 잃어서 원한을 가진 자가 많고, 혹 그 부모가 죽으면 형제와 친족들은 재물에 탐욕을 내어 그 무후(無後)한 것을 이롭게 여겨서 마침내 아내를 두거나 시집가는 것을 못하게 하므로 원망하는 기운이 심하여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혼인에 예물을 보내는 즈음에 사치한 물건을 일체 금지하고, 나이가 20세로서 혼인하지 아니하면 부모를 죄책하여 남녀의 예()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면 음양이 화하고 음양이 화하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습니다.

 

둘째, 수령 선발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나라 신하 주희(朱熹)가 효종(孝宗)에게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천하의 이해(利害)는 백성들의 휴척(休戚 편안함과 근심)에 달려 있고 백성의 휴척은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수령 선발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잡과(雜科)의 무식한 무리와 권문(權門)에 뇌물을 주고 얻는 무리가 많이 있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어둡고 정사를 돌보지 아니하며, 재물 쓰기를 절약하지 아니하고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추지 아니합니다.

흉년이 들면 사실대로 아뢰지 아니하고, 유민(流民)이 굶주리는 것을 고하면 양식을 때맞추어 주지 아니하니, 부잣집에 가서 사채(私債)를 빌립니다.

이런 까닭으로 부자는 전토가 밭두둑을 연하였으나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으니, 혹은 부자에 의탁하여 종이 되고 혹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마을은 열 집에 네댓집이 없어졌는데도, 감사(監司)는 오로지 공급(供給)과 수응(需應)을 잘하는 것을 어질다 여기고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는 근심은 묻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들이 마음대로 탐혹(貪酷)하여 백성의 고혈(膏血)을 착취하니, 의창(義倉)의 많은 속미(粟米)가 반은 사가(私家)로 들어가고 반은 권문(權門)으로 들어가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니 우리 백성이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먼저 사람을 고르는 것이 중합니다.

우선 이조와 사헌부 그리고 의정부가 살펴서 전하께 올려 전하가 등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옳은 사람을 얻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얻으면 백성의 원망이 사라질 것이고, 백성의 원망이 사라지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종실록 14784153번째 기사)

 

 

순례자의 노래 (17)

- 남효온의 상소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78(성종 9) 415일에 성균관 유생 남효온(南孝溫)이 올린 상소문을 계속 읽어보자.

 

"셋째, 사람을 쓰는 것과 버리는 것을 삼가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데에는 문과(文科무과(武科)가 있고 잡학과(雜學科)가 있으며, 승음(承蔭)의 절목(節目)이 있고 이임(吏任)의 절목이 있으며, 과목(科目) 외에 또 효자(孝子순손(順孫)을 찾아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 또 신이 듣건대,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는데,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어찌 몇 사람뿐이겠습니까?

 

인재는 성상께서 구하시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 경연을 신임하시면 경연보다 어진 사람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이르지 않겠습니까?

어진 사람과 군자(君子)가 조정에 많이 모여 왕가(王家)를 좌우에서 도우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궁중의 내수사(內需司)를 없애는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옛 임금은 백성과 더불어 이()를 다투지 아니하였고 사사로이 간직해 두지 아니하며, 그 궁중(宮中)에서 쓰는 바는 경()의 녹(祿)10()이니, (祿)이 경()10배가 되면 사사로이 간직하는 것이 없어도 족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각 고을에 사제(私第)를 세우고 본궁 농사(本宮農舍)’라고 일컬으며, 사사로이 곡식과 포백(布帛 베와 비단)을 비축하여 날마다 백성들과 더불어 매매하여 이익을 취하고, 또 서울 안에는 내수사(內需司)를 세워 별좌(別坐) 몇 명과 허다한 서리(書吏)가 고을에 왕래하면서 주구(誅求)함이 끝이 없으며, 조운(漕運)해 올려와 많이 쌓아 모아 놓아서 썩기까지 합니다.

 

혹은 이것으로써 음사(淫祀)를 수축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본궁(本宮)에서 사사로이 간직한 것이라.’고 하니, 아아! 하늘에 낸 재물은 단지 그 수()가 있을 뿐이므로, 백성에게 있지 아니하면 나라에 있을 것이고 나라에 있지 아니하면 백성에게 있을 것입니다.

 

신이 모르기는 하나, 내수사의 재물과 곡식은 다만 우리 백성에게 나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 조정의 다스리는 도()가 멀리 하((() 삼대(三代)를 따랐는데, 유독 내수사 하나만은 한()나라 환제(桓帝)와 당()나라 덕종(德宗)의 고사(故事)를 그대로 따르니, 신은 그윽이 이를 부끄러워합니다.

 

전하께서 지난날에 이미 그 폐단을 아시고 사채(私債)를 조금 줄이시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목을 늘이고 다스려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음으로 망령되게 원하건대 전하께서 공명(公明)한 도량을 넓히시어 소민(小民)의 폐()를 밝게 살피시고 빨리 내수사를 혁파(革罷)하여, 노비(奴婢)는 장례원(掌隷院)에 소속시키고, 미곡은 호조(戶曹)에 소속시키며, 기용(器用)은 공조(工曹)에 소속시키고, 재백(財帛)은 제용감(濟用監)에 소속시키소서.

 

만약 왕자·왕손·공주·옹주(翁主)가 궁()을 나가 사저에서 살면, 장례원에서 노비를 이바지하게 하고 호조에서 전지(田地)를 이바지하게 하며 공조에서 기용(器用)을 이바지하게 하고 제용감에서 재백(財帛)을 이바지하게 하여 각각 정한(定限)이 있게 하고 궁중에서 사사로이 수용(需用)하는 것은 왕제(王制)의 십경록(十卿祿 경의 10배의 봉급)에 의하여 대체(大體)를 온전히 하고 민심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민심이 기뻐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종실록 14784153번 째 기사)

 

 

순례자의 노래 (18)

- 남효온의 상소 (3)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78(성종 9) 415일에 혼인, 수령의 선발, 내수사의 폐지 등을 건의한 24세의 성균관 유생 남효온의 상소는 계속된다. (성종실록 14784153번 째 기사)

 

다섯째, 무당과 부처를 물리쳐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무당은 삼풍(三風 ((()의 세 가지 나쁜 풍속)가운데 그 하나이며, 부처는 본래 서역(西域)의 교()인데, 옛 제왕은 모두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보탬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음사(淫祀)를 섬기면 복이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유교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쳐서 무당을 성밖으로 내쫓고 승도(僧徒)를 저잣거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온 국민의 복이며 우리 유자(儒者)의 다행입니다.

 

그러나 음사(淫祀)는 파하면서 국무(國巫)의 설치는 그대로 있으니, 신은 국무가 무슨 일을 맡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불교를 배척하면서 주지(住持)를 두는 것은 그대로 있으니, 신은 주지기 무슨 직사(職事)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사람들은 사람의 생사 화복(生死禍福)이 모두 무당에게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이릅니다. 혹은 49()라고 일컫고 혹은 수륙재(水陸齋)라고 일컬으며 혹은 일재(日齋)라고 일컫고 혹은 재승반불(齋僧飯佛)이라고 일컬으면서 사람의 수요귀천(壽夭貴賤)과 사람이 죽은 후의 영고(榮苦)가 모두 부처에게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니, 하늘에 대해 방자하고 신()을 속이는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므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은, 이것이 한 단서입니다. (...)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먼저 국무(國巫)를 없애면 음사(淫祀)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전하께서 먼저 주지를 없애면 불사(佛事)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이단이 없어지고 하늘과 사람이 화합(和合)하면 재이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학교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전에 집에는 숙()이 있고 5백호에는 상()이 있고 125백호에는 서()가 있고 나라에는 학교(學校)가 있어서, 사람이 나서 여덟 살이 되면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열다섯 살이 되면 대학에 들어가니, 어디에서나 배우지 아니하는 곳이 없고 선비가 아닌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이제는 이미 가숙(家塾)과 당상(黨庠)은 없고 태학(太學:성균관)도 유명무실하며 훈고(訓詁)를 배우고 사장(詞章)을 익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박힌 것이 깊고 사람을 그르친 지가 오래되어서, 사유(師儒)가 된 자는 한갓 구두(句讀)만 일삼고 제자가 된 자는 과거 시험에 이름을 다투어 장구(章句)를 아름답게 꾸미고 병사여륙(騈四儷六 뜻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미문조 美文調)하며 방계곡경(傍蹊曲逕)으로 다만 벼슬만을 구하니, 전하께서 누구를 얻어서 부리겠습니까?

 

비록 한두 사람 학문의 이치를 궁구하며 참되고 올바른 선비가 있을지라도 태학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며 사유(師儒)가 거기에 맞는 사람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니, 그 뜻은 대개, ‘내가 저 사람에게서 도()를 배우려 하나 저 사람은 도가 없으며, 내가 저 사람에게서 학업을 배우려 하나 저 사람은 학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성균관에 벼슬할 사람을 먼저 좌우에 물어서, 좌우에서 모두 좋다고 말한 뒤에 경상(卿相)에게 묻고, 경상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 대부(大夫)와 사()에게 물으며, 대부와 사가 모두 좋다고 한 뒤에 백성에게 묻되, 백성이 모두 좋다고 한다면 반드시 현인 군자(賢人君子)일 것입니다. 하나의 현인군자를 얻어서 사표(師表)를 삼으면 배우는 자의 익히는 바가 저절로 바르게 되며 사람들이 효제 충신(孝悌忠信)의 귀함과 사장(詞章)의 말습(末習)이 비루(卑陋)함을 알아서, 학교가 일어나고 인재가 나올 것이니, 인재가 나와서 명신(名臣)이 성하게 되면 재이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