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망국사 (4)
조선 망국사 (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1901년 1월에 주일러시아 공사 이즈볼스키가 일본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했다. 1902년 5월에 고종은 한반도 분할에 대비하여 평양에 궁전을 짓는 공사를 명하면서 내탕금 10만 원을 내려보냈다. 평안도 백성들은 내탕금의 20배인 206만 원을 공사비로 부담하여 민생이 파탄났다.
1903년 11월 평양에 태극전과 중화전이 완공되어 고종과 황태자의 어진이 모셔졌다. 그런데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공사는 중단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것인가. 4월 14일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함녕전, 중화전과 전각들이 모두 불탔다. 이러자 고종은 미국공사관과 인접한 왕립도서관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 거처했다.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토목 공사에 대하여 아뢰었다.
“토목 공사는 없을 수 없지만 무절제하면 나라를 망하게 만듭니다. 폐하는 재위 40년 동안 안일과 사치를 좋아한 적은 없었지만 토목공사만은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아! 을미년(1895) 이후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하신 것은 변란에 임시로 취한 조치였습니다. (...) 경복궁과 창덕궁 두 대궐은 역대 임금들이 살아온 법궁(法宮)이니, 폐하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외국의 군사들이 수도에 들어온 때에 불행하게도 화재가 나는 바람에 경운궁이 모두 불타 버렸으니 이것은 작은 변고가 아닙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건대, 폐하께서는 아직 불이 꺼지기도 전에 곧바로 다시 세우는 일을 의논하였다고 합니다. (...)
또한 듣건대, 서경(西京)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한 도(道)의 민력이 먼저 고갈되었다고 합니다. 서경에 궁전을 짓는 것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며, 백성들의 원한을 쌓으면서 궁전을 만들어 놓고 황제와 황태자의 진전(眞殿)을 그곳에 모셔다 두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입니까? (...)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데 서경은 공교롭게도 그 요충에 있으니 장차 화가 미칠지 모릅니다. (...) 이처럼 재력이 궁핍한 때에 기근까지 닥치고 전쟁까지 덮친 마당에 토목공사로 백성들을 부리니 폐하의 청렴한 덕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폐하는 살피소서.”
열흘 뒤인 7월 25일에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도 토목공사에 대하여 아뢰었다.
“지금 시국이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위급합니까? 군신 상하가 밤낮없이 바쁘게 뛰어도 타개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데, 지금 어찌 토목 공사나 벌이고 대궐을 수리하며 벼슬자리를 말아먹고 인재를 버리며 관리들을 마구 내보내어 잡세(雜稅)를 거둬들이며 관제(官制)를 고쳐 쓸데없는 관리들을 늘일 때이겠습니까?
창덕궁과 경복궁은 열성조에서 있던 곳으로서 진실로 제왕의 거처입니다. 경운궁이 화재를 당한 날 마땅히 약간 수리를 하고 당일 돌아와 거처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거액의 비용을 허비하며 토목 공사를 크게 벌이면서 중건공사를 하는 것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는 속히 공사를 파하시고 옛 대궐로 거처를 도로 옮기소서.
아울러 민영철이 지난날 평안도에서 서경 궁궐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매향전(賣鄕錢)을 집집마다 거두어들여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습니다. 민영철을 속히 조사하여 정죄(正罪)함이 마땅합니다.”
고종은 1899년 8월 17일에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를 반포한 이후부터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한 전제군주였다. 러일전쟁이 덮치고 재력이 고갈되고 기근까지 닥쳤는데도 고종은 백성의 등골이 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경운궁 공사를 강행했다.
필자는 스스로 묻는다. 고종은 망국의 군주인가? 개혁군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