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10)- 남효온의 소릉 복위 상소 (1)
순례자의 노래 (10)
- 남효온의 소릉 복위 상소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0년 9월에 김시습과 남효온, 김일손은 북한산 중흥사에서 5일간 함께 지냈다. 추강 남효온(1454∽1492)은 1478년(성종 9년) 4월 15일에 성종에게 올린 소릉(단종의 모친 현덕왕후의 능) 복위상소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1478년 4월 1일에 흙비[土雨]가 내렸다. 세조비 정희왕후(1418∽1483)의 6년 2개월간의 수렴청청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지 2년 된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흙비를 천재지변으로 받아들이면서 승정원에 전교(傳敎)하였다.
"이제 흙비가 내렸으니 하늘의 꾸짖음이 가볍지 아니하다. 예전에 수(隋)나라 황제가 산을 뚫고 땅을 파며 급하지 아니한 역사(役事)를 하자, 마침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토목 공사를 번거롭게 일으키므로 백성의 원망이 흙비를 부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금 숭례문(崇禮門)의 역사(役事)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또한 그리 급하지 아니한 역사는 아니었는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
성종은 도승지 이하 승정원 직원들을 꾸짖었다.
이러자 도승지 신준 등이 아뢰었다.
"신 등은 단지 날씨가 흐린 것만 보았고 흙비가 내리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혹시 알았다면 어찌 감히 아뢰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신준의 답변은 덤덤했다.
어어서 좌부승지 손비장이 아뢰었다.
"옛 성왕(聖王)과 철왕(哲王)은 반드시 재이(災異)를 만나면 두려워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도 또한 직언(直言)을 들어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고자 하시니 매우 훌륭하신 마음입니다."
이러자 성종은 "알았다." 하였다.
(성종실록 1478년 4월 1일 2번째 기사)
이윽고 성종은 의정부에 전지(傳旨)하였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같아 현상(現象)과 본체(本體)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상서로움과 재변이 감응하는 것은 오직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사리분별에 어두운 내가 임금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지난 달에는 지진(地震)이 있었고 이번엔 흙비가 내리니, 이런 천재지변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금이 과중하였는가? 공역(工役)이 번거로왔는가? 형벌이 바르지 못하였는가? 인사가 잘못되었는가? 어질고 뛰어난 이가 혹 등용되지 아니하였는가? 혼인이 때를 놓쳤는가? 수령(守令)의 탐학이 심한데도 감사(監司)의 좌천과 승진보고가 잘못되었는가?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는데도 백성의 사정이 제대로 보고되지 못하고 있는가?
허물을 얻은 이유를 깊이 생각하건대 허물은 진실로 내게 있으므로, 직언(直言)을 들어 하늘의 꾸짖음에 응답하고자 한다. 조정 안팎의 대소 신료부터 민간의 소민(小民)에 이르기까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재변이 일어난 이유와 재변을 그치게 할 방법을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라."
(성종실록 1478년 4월 1일 3번째 기사)
성종은 스스로 반성하면서 대소신료와 백성들에게 구언을 청했다. 요즘 같으면 대통령이 공무원과 국민들에게 해결책을 요청한 것이다.
성종이 구언(求言)을 청한 지, 이틀 후인 4월 3일에 성종은 면복(冕服)을 갖추고 문묘(文廟)에 들어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명륜당에 나아가 양로연을 베풀었다. 참석자는 영의정 정창손등 조정 대소 신료와 성균관 유생등 모두 2천 8백여 인이었다.
성종은 신하들에게 "오늘 양로연을 베풀고 바른 말을 청하니, 각각 좋은 말을 진술하라."고 말하였다. 그만큼 성종은 새 정치를 할 의욕에 차 있었다.